이경래 신부 칼럼  
 

우리의 구원은 주의 이름에 있으니(예수이름, 송구영신)
작성일 : 2022-01-01       클릭 : 30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송구영신)

민수 6:22-27 / 필립 2:5-11 / 루가 2:15-21

 

 

우리의 구원은 주의 이름에 있으니

 

 

며칠 전 우리는 아기예수 오심을 경축하였습니다. 그리고 1225일 성탄절을 지낸 교회는 곧이어 맞이하는 11일 새해를 우리 신앙의 중심이신 거룩한 이름 예수축일로서 시작합니다. 인류역사 연표가 예수님 오심을 기준으로 해서 주전(BC, Before Christ)과 주후(AD, Anno Domini)으로 나누는 것처럼 오늘 송구영신 예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옛것을 보내고(送舊), 새것을 맞이하는(迎新) 한 해의 분기점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송구영신 감사성찬례에 봉독하는 독서와 시편, 복음말씀 모두 거룩한 이름 예수 축일전례독서로 구성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 건물, 물건 심지어 어떤 일에 대하여 축복할 때, 예수이름으로 합니다. 우리 성공회 기도서에도 여러 가지 축복예식문에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이름에 있나이다.”라는 말로 축복기도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새로 서품 받은 사제가 첫 강복을 할 때 이 말로 시작하면서 한 사람씩 축복하는 모습을 보면 그 거룩함이 더 깊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교인들이 예수이름으로 기도하고, 교회활동을 하면서도 예수이름 뜻이 뭔가요?”하고 질문 받으면 제대로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란 이름은 그리스어 발음으로서 주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여호수아(Yehoshua)’, 아람어에서는 예수아(Yeshua)’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뜻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구별하기 위해 ‘~의 아들, 예수혹은 ‘~지방사람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라던가 나자렛사람 예수라고 불렸습니다. 교회예술은 이러한 예수의 이름으로 상징(emblem)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 앞면 그림에 소개했듯이, IHSJHS 두 가지 철자가 있습니다. 앞 글자 IJ가 다른 것은 그리스어 철자에선 앞 글자가 J가 아니라 I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은 모두 '예수(Ιησούς, Jesus)'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글자 중간에 십자가를 삽입하거나 팔에 두 개, 다리를 포갠 1개로 못을 박은 모두 3개의 십자가 못을 첨가하기도 하고, 빛을 표시하는 테두리를 넣는 등 다양하게 예수님 엠블럼을 만들어 교회의 주인은 예수이시며 우리는 이 분을 구세주로 믿습니다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회의 원리와 기초가 종종 망각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겪은 작은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몇 년 전 중국종교인지도자들이 한국종교를 견학하러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측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한국의 주요교회 방문을 안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곳 교회 담임목사께서 이곳은 내 교회입니다라고 본인과 그 교회를 소개하는 말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분은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제법 명망 있는 분이셨는데, 저는 그 말을 듣고 많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그 목사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후계자들, 특히 주교, 사제 등 교회를 책임 맡고 있는 이들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이시다라는 근본명제를 망각함으로 인해 교회가 사유화되어 부패하고, 결국 갈라지게 만든 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강화성당은 그러한 과거 교회의 잘못을 타산지석 삼아서 내 이름을 중심에 놓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내 신앙의 중심, 우리교회의 머리로 삼고 살아갑시다. 그럴 때 예수이름은 우리를 축복하는 구원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지 예수이름만 부른다고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만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그저 이름만 부른다면 그것은 일종의 마술주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이름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고, 결국 진정한 구원과는 하등 관계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행복과 영원한 구원을 희망하는 우리 신앙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이름 안에 담긴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본질을 알고, 그 인격과 만나 바로 그 곳에 우리의 삶과 신앙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오늘 제2독서는 그 유명한 케노시스(Kenosis) 찬가로서 하느님의 자기비움을 찬미하는 시입니다. 성탄절에 하늘에 계신 하느님 말씀이 땅에 내려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찬미했던 우리는 오늘 예수이름 축일에 케노시스 찬가를 들음으로써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위대한 삶의 극치를 다시한번 깊이 느낍니다. 찬가의 전반부에서 사도바울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예수님이 자신을 다 내려놓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구원의 사명에 순종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이러한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만물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찬양하게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찬미가를 필립비 교회 교인들에게 쓴 것은 교인들이 고백하는 예수가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이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이름이란 형식과 예수님의 삶이란 내용이 만날 때 예수이름 기도는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교회는 2021년을 보내며 오래된 나이테에 한 줄을 하나 더하고 있습니다. 이제 2021년은 우리교회 역사라는 책에 한 부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었고, 슬픔과 괴로움도 있었습니다. 또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베드로 전서 57절의 말씀, 여러분의 온갖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예수이름을 부르며 기도합시다. 그러면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구세주 예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부족함, 나약함을 잘 아시고 당신의 그 큰 그릇에 담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2022년 새해를 맞이하며 다시 한 번 예수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닮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2:5)”라고 권면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내 마음에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담고 살아간다면, 우리 각자는 물론 우리가정은 화목해지고, 우리교회는 더욱 더 주님의 교회가 될 것이며, 우리사회는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러한 소망을 기도합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어떻게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줘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제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이 축복의 말씀으로 저의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 주시고,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민수 6: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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