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삼위가 하나이다”라는 의미(다해 성삼위일체주일)
작성일 : 2022-06-12       클릭 : 23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612 다해 성삼위일체주일

잠언 8:1-4, 22-31 / 로마 5:1-5 / 요한 16:12-15

 

 

 

삼위가 하나이다라는 의미

 

 

예전에 천주교 신부님 그리고 개신교 목사님과 대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스도교 각 교단의 특징을 논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그 때 성공회와 천주교, 개신교 간의 특징을 인생에 비유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개신교,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마치 청년과 같고, 천주교는 중년과 같고, 성공회는 노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만의 가치, 생활을 위해 출발하는 청년기는 흔히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다른 연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모험심과 활력이 높아 여러 가지 경험을 시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경험이 풍부하지 못한 관계로, 정의감은 높지만 이해심은 좀 부족합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갖고 있는 열정과 의욕 그리고 성장에 대한 강한 열망은 어쩌면 청년기의 특징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포용이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좌충우돌하며 인생을 살던 청년이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해서 조직에 몸담고, 어느덧 사회조직의 중견으로 성장하는 중년시기에 사람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조직의 발전을 위해 라는 개성보다는 우리라는 집단을 중시하게 됩니다. 천주교가 다른 교단보다도 시스템을 중시하고 조직을 보호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보다 조직에서 제시하는 교리와 규율에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중년시기 인생의 특징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육체적 기력이 떨어짐에 따라 인간은 사회적 노동에서 물러나와 점차 홀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노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원할 것 같은 육체적 젊음도, 사회적 지위와 권세도 모두 물려준 노인은 이제 지나 온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들을 성찰하면서 그것들의 한계를 점차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것이 뭔지 찾게 됩니다. 다른 교단에서 성공회를 평할 때, 강렬한 열정도, 딱 부러지게 규정하는 교리와 규율도 약하다고 하지만, 제가 느끼기엔 이것은 청년과 중년을 다 체험한 노년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년은 젊은이의 고민도 들어줄 수 있고, 중년가장들의 고뇌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청년, 중년, 노년의 특징이 다 다르지만 모두 인생이라는 하나의 큰 줄거리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각 단계는 결국 인간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하나의 신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취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장면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용어를 통해 이론화, 교리화된 것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한 갖가지 다양한 학설들이 제기되고, 그러한 치열한 논쟁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으로 확정되면서 성립되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붙인 책들은 서고에 넘칠 정도로 많으며, 신학자들은 신이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일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온전히 만족할 만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2세기 경 서방교회의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Crdeo quia absurdum e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후세에 몇몇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 말을 남용해서, 신앙은 이해할 수 없으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악용하기도 했지만, 테루툴리아누스가 말한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 이성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궁극적 영역은 인간이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신비일 수밖에 없다는 겸손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을 강조하는 우리 성공회 신앙의 자세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 있는 성경말씀에 따라, 우리 신앙에 필요한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지혜의 역할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서는 지혜, 그 중에서도 창조와 관련되어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만드실 때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를 사용하셨습니다. 지혜는 마치 설계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이를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는 이 지혜가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이점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과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언에 나오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의 지혜는 단지 인간에게만 있는 독점물이 아니라, 동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도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히, 기후와 환경위기가 심각한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창조, 하느님의 지혜가 온 세상만물에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가꾸고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오늘을 삼위일체주일이면서 동시에 환경주일로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경청과 말하기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며,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요한 16:13)”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불통을 극복하는데 좋은 귀감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상대방과 대화할 때, 자신의 생각 틀에서 이해하고 거기에 준해서 상대방에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때때로 상대방의 뜻을 왜곡할 위험이 있고, 결국 많은 대화를 했지만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자기생각대로 말하기에 앞서서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해서 듣고 거기에 대해 잘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시련을 이겨내는 힘에 대해서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시련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 5:3-4)”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에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주는 귀한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통과 시련이 오면, 좌절하여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져듭니다. 설사 어려운 시기가 지나갔다 하더라도, 과거에 경험한 이런 감정들이 남아 있어서 새로운 상황, 심지어 긍정적인 신호가 오더라도 낙관적이기 보다는 비관적인 태도로 힘차게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과거의 고통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하느님께서 내 안에 주신 주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심(로마 5:5)”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끈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삼위일체 신비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울지 모르지만, 삼위일체를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참 많은 교파로 분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저 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교단간의 건강한 소통을 위해서라도 중요한 모범이 됩니다. 또한 세대 간 소통이 어려운 오늘날의 세태에서도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이라는 하나의 인생 안에서 순례하는 인생여정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각 세대들이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귀감이 될 것입니다.

이제 삼위일체 주일을 시작으로 우리 신앙의 사이클은 연중시기로 접어듭 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간의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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