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가해 부활5주일)
작성일 : 2023-05-07       클릭 : 11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507 가해 부활5주일

사도 7:55-60/1베드 2:2-10/요한 14:1-14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우리는 매 주일예배 때 마다 니케아 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I believe … maker …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 구절의 의미를 단지 좁은 신학적인 명제 정도로만 이해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생과 세상에 대한 경험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해감에 따라 이 말씀이 주는 심오한 뜻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이 구절을 성부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성부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인데, 이 세상이란 그저 우리 눈에 보이는(seen)’ 것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unseen)’ 것까지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신앙인들에겐 눈에 보이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이 전부라고 알고 있을지 몰라도, 신앙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그 나라가 있음을 보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창조는 눈에 보이는 우주를 비롯한 물질세계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무한합니다.

신경(Creed)은 이제 이러한 창조주가 곧 우리의 구세주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성자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신경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unseen)’ 하느님의 보이는(seen)’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요한 14:4) 그리고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요한 14:5) 그러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9)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인간의 인식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포괄하는 하느님의 인식 사이에 있는 커다란 간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간극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과거를 경험과 기억으로 알지만, 미래는 아직 모르는 채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시고 주재(主宰)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시적(通時的)으로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사정을 잘 아시는 예수께서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간극을 이어줄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오직 믿음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지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행위입니다. 마치 우리 예배에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전례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하여 그 의미를 깨달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선 불완전합니다.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있지만, 그 자유로움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샛길로 갈라질 수 있는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전례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빵과 포도주를 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이 됩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우리 예배에 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통합은 바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은 이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전례에서만, 그리고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전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예컨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할 때, 거기에는 말과 행위가 함께 있어야 온전해집니다. 만일 말만으로 엄마, 아빠를 사랑해요!”, “나는 우리 아이들을 사랑합니다라고 하고, 그에 따르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경우, 반대로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가 헌신하고 있지만, 아무런 말이 없을 때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성한 자식들이 매달 부모를 위해 생활비를 보내고 있지만, 부모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면 부모는 몹시 외로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에 믿음과 신뢰가 있을 때, 때때로 말이 부족하고 행동이 어설퍼도 보여지는 것 너머에 있는 보이진 않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스테반(Stephen)은 이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가득차서 용기 있게 유대교의 대사제들 앞에서 진리를 증언합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스테반의 증언에 마음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대감이 증폭되어 그를 돌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자기가 증언한 말씀을 마침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죽임으로서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셨듯이, 스테반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넘어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이제 다시 보이는 영역으로 옵니다. 그것은 스테반을 죽이는 데 동참한 바울의 회심을 통해 드러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죽음을 이기고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보이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전진해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선교(Mission)’라고 부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거엔 우리가 보고, 듣고, 소리 내고, 활동하는 반경이 한계가 있었지만,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각종 교통수단을 통해 다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무병장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인공지능까지 생겨서 우리는 뇌까지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부활, 영원한 생명 등과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점점 우리 삶에서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고, 그 결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믿음이 소멸해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물질적인 것들도 사실 오래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꿈꿔왔고 노력해 왔고, 그래서 오늘날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12절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시기를 보내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통해서 보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과 그 영원한 가치를 믿고 느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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