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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성공회사상가4. 윌리엄 템플

작성일 : 2017-03-31       클릭 : 422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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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사상가​ 4.

윌리엄 템플

(William Temple, 1881 – 1944)

윤 정현 그레고리(대전교구 사제)

성공회 사상과 영성가를 소개하는데 맨 먼저는 사회주의 사상가이지 사제인 프레더릭 모리스을 소개했고, 이어서 복음주의 사회참여자인 윌버포스의 신앙과 사상을 알아보았다. 세 번째는 여성 최초로 영국신학교 강단에 선 이블린 언더힐의 사상과 삶 그리고 언더힐의 피정인도와 영성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20세기 대 사상가이자 교회일치와 사회참여의 큰 스승인 윌리엄 템플 캔터베리 대주교를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 자료는 위키 백과사전을 참조했으며, 앵글리간 역사사전과 성공회 거룩함의 여정(Love’s Redeeming Work: the Anglican Quest for Holiness)를 참고하였다. 


윌리엄 템플은 1881년 캔터베리 대주교인 프레더릭 템플(Frederick Temple, 1821~1902) 주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윌리엄은 발리올 칼리지(Balliol College),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고전과목에서 두 차례 수석을 하였다.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서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철학분야 연구원과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렙톤 스쿨(Repton School) 교장을 지냈으며, 1921년 교구의회에서 맨체스터 교구 주교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 요크 대주교로 승좌하고, 1942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어 2년 동안 시무하다가 선종하였다.

성직자로 사목하면서도 윌리암 템플은 철학 연구 작업을 꾸준히 하여 1917년에는 그의 철학 대작인 “창조적 정신”(Mens Creatrix; The Creative Mind)을 펴냈다. 1932년에서 33년 사이에 인문학 강의인 길포드 강좌(the Gifford Lectures)에 섰으며, 그의 강의록이 “자연, 인간,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제목으로 1934년에 출판되었다.

윌리엄 템플은 캔터베리 대주교로 승좌하여 1942년에는 유태인과 그리스도인 간의 대화모임을 설립한 회원 중의 중요한 한 사람이었고, 캔터베리 대주교 가운데 집무실에서 순직한 유일한 인물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변증가, 빼어난 교사요 전도자, 교회일치 운동가이면서 사회계급도 다르고 관점도 달랐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였던 인물이다. 20세기 전반부에 템플만큼 폭넓고 다양하게 사역한 인물도 드믈다. 템플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와 성공회 신앙을 배우고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소년시절
템플은 1881년 영국 남쪽 해안지역인 데본지역의 엑스터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프레드릭 템플(1821–1902)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통풍과 눈의 백내장으로 고생을 하였고, 40세에 오른쪽 눈이 실명하는 원인이 되었다.    

러비고등학교(Rugby School), 발리올 컬리지(Balliol College),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고전과목에서 두 차례 수석을 하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옥스퍼드대학에서는 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서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철학분야 연구원과 강사를 지냈으며, 190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10년에서 1914년까지는 립톤 학교에서 교장선생으로 일하였고 그 후에는 교회에서 사목하였다. 1916년에는 프란세스 안손(Frances Anson)과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921년 그의 나이 40세에 맨체스터 교구 주교로 임명되었고, 48세에 요크대주교가 되었다.

신학사상과 사회개혁
1942년 템플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어 ‘그리스도교와 사회질서’(Christianity and Social Order)라는 책을 펴내고 유태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모임을 만들었다. 그리스도교에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그리스도교와 사회질서’ 책은 선풍을 일으켰고 14만부 이상이 팔렸다.

템플은 노동자 운동을 옹호하였고 경제와 사회의 개혁을 지지하였다. 템플은 1918년에서 1925년까지 노동당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 교육위원회 초대 의장직(1908–1924)을 맡았다. 또한 템플은 1924년에 열린 그리스도교 정치, 경제 그리고 시민권에 관한 국제 각 교파 회의(international and interdenominational Conference on Christian Politics, Economics and Citizenship)의 의장을 맡았고, 교회일치운동(the ecumenical movement)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템플은 1927년 로잔에서 가진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에 성공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는 1937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 2차 세계대회를 준비하고 회의를 주재하였다. 
 
1944년 다양한 교파를 규합하여 교육법을 지지하게 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영국교회협의회(the British Council of Churches)를 결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결성되도록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윌리엄 템플은 랍비들의 대표였던 조셉 허츠(Joseph Hertz)와 함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위원회(the Council for Christians and Jews)를 설립하여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에 맞서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신학 사상은 길포드 인문학 강좌에서 잘 드러났다.  

템플의 신학은 당시에 진화론자로 간주되는 하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와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와 같은 사상가들이 펼친 과정신학과 철학을 받아들인 신학자 중에 괄목할 만한 선두 주자였다. 


템플의 주요활동
1) 교회갱신운동
생명과 자유(Life and Liberty) 운동: 영국 성공회는 국교이기에 마치 정부의 한 기관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교회예산이나 주교 임명 같은 큰 문제는 의회가 최종결정을 내렸다. 신앙적 문제는 수준은 그만 두더라도 신자도 아닌 의원들이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 템플은 모순이라고 보고, 의회에서 교회의 중요사 의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피커딜리 성 야고보 교회를 사임하고 “생명과 자유”운동이라는 교회갱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 운동의 목적은 교회의 자율적인 결정과 평신도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가 신앙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교회의 대소사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평신도들이 자율적으로 교회선교에 참여하고 주체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운동을 위해 템플은 교회에서 받던 급여를 포기하고 1/3 수준의 수입으로 살기도 하였다. 이후 템플은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모임을 주선하고 교회갱신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2) 대학선교: 당시의 대학사회는 철학적 회의주의가 만연되었다. 템플은 지성사회를 다니면서 지적이고 영성적인 열정으로 대학의 모임에서 강의를 하고 매일 밤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템플은 대학선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3) 교회일치 운동: 템플은 교회일치에 관심을 갖고 1910년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 회의(the Faith and Order Conference)에 참가하였다. 이 회의는 개신교 교파들을 갈라놓는 교리와 제도 문제를 다룬 국제회의였다. 교회일치운동을 이끌던 템플은 1929년에는 신앙과 직제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37년에는 교회일치 운동을 교회갱신운동인 ‘생명과 일’과 결합시켜 주도적으로 나아갔다. ‘생명과 일’ 운동은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었다. 교회갱신과 교회일치 운동을 펼치면서 템플은 로마 천주교와 뿐만 아니라 정교회와 대화도 전개하였다. 교회일치운동은 더 나아가 인도의 연합교회를 결성하는데 템플의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지속되어 마침내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신교와 정교회를 향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윌리엄 템플을 세계적인 교회일치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4) 2차 세계대전: 전쟁 중에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영국민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들을 돕는 구호활동을 하는가 하면 영국정부를 설득해 유대인들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평화와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무력은 최소한으로 해야 하고 독일 전쟁포로들도 인간다운 예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1944년 여름 그의 노르망디 방문은 중세 이후 전쟁지역을 방문한 최초의 대주교가 되게 하였다. 그는 무조건적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를 위해 포괄적 사상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반전주의자들도 템플을 신뢰하였다.

죽음과 화장예식
템플은 켄트주의 '웨스트게이트-온-시(Westgate-on-Sea)'에서 1944년 10월 26일에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켄트주에 있는 체어링 화장터(Charing Crematorium)에서 화장(火葬)예식으로 치려졌다. 그는 전 영국 교회사에 걸쳐 화장된 첫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으며, 화장식은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템플의 화장한 재는 캔터베리 대성당 코로나 남쪽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아버지 곁에 묻혔다. 템플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활약한 신학자이자 대주교였던 성 안셀름 이후 가장 훌륭한 캔터베리 대주교로 간주되기도 한다.

템플 이름의 학교와 교회 그리고 기념일
크로이던에 있는 테니슨 대주교 성공회 고등학교에 있는 한 학교건물은 템플 사후에 윌리엄 템플 대주교 기념관이라고 하였다.

랭카셔 지방의 프레스톤(Preston)시 풀우드(Fulwood)에 있는 학교 이름이 템플 사후 윌이엄 템플 대주교 고등학교라고 교명을 붙였다.

맨처스터에 있는 윌리암 템플 대학은 그의 사후에 윌리암 템플 기금(William Temple Foundation)으로 도시 산업사회 사목과 개발훈련을 위한 연구 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윌리엄 템플 대학은 1947년 플린셔 지방 하와든에서 시작된 학교였으나 1954년에는 위릭지방 럭비(Rugby in Warwickshire)로 1971년에는 맨처스터로 옮겨 윌리암 템플 기금으로 개명되었다.

헐 시에 캔더베리 대주교 윌리암 성공회 초등학교(The Archbishop William Temple C of E Primary School in Hull)도 템플 사후에 이름이 붙여졌다.

교회에도 윌리엄 템플 대주교 이름이 붙여졌다. 런던 아비 우드(Abbey Wood, London)에 한 교회가 있고, 테임메드 팀 사목(Thamesmead Team Ministry)을 하는 교회 가운데 한 교회도 템플 이름을 붙였다. 또 다른 교회는 위든사웨(Wythenshawe)에 있는 윌리엄 템플 교회로서 맨처스터 교구의 위든사웨 팀 사목(Wythenshawe Team Ministry)을 하는 교회 중의 하나이다. 셰필드 만노 파크(Manor Park, Sheffield)에 있는 윌리엄 템플 교회는 성공회 셰필드 교구와 셰필드 감리교 연회, 그리고 요크셔 침례교 연합과 개혁교회 연합 총회 간의 교회일치와 협동사목을 위한 마노 에큐메니칼 동반자 선교(the Manor Area Ecumenical Mission Partnership between the Church of England Diocese of Sheffield, the Methodist Sheffield District, the Yorkshire Baptist Association and the Yorkshire Synod of the United Reformed Church)를 하는 교회 중의 하나이다.


런던에 있는 국제학생기숙사는 템플의 이름을 따라 윌리엄 템플관이라고 하였다.

미국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있는 상담과 사회봉사 기관은 템플 사후에 템플회라 하였다.

엔필드에 있는 스톱포드 학교의 건물이 하느님의 종중의 종, 윌리엄 템플 대주교를 기념하여 지어졌다("The House of William Temple, Head Master, Archbishop, and servant of God").

영국교회와 성공회협의회 회원교회는 11월 6일을 교회일치와 교회의 사회참여를 위해 헌신한 윌리엄 템플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저서
The Nature of Personality (1911)
Church and Nation (1915)
Mens Creatrix (1917)
Fellowship with God (1920)
Life of Bishop Percival (1921)
Plato and Christianity, three lectures (1916)
Personal Religion and the Life of Fellowship (1926),
Christus Veritas (1924)
Christianity and the State (1928)
Nature, Man and God Gifford Lectures (1934)
Men Without Work (1938)
Readings in St. John's Gospel (1939/1940. Complete edition 1945.)
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
The Church Looks Forward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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