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마당 4호 제작비용 및 후원 현황(7/1-10/31)
시론
특집글
살며 생각하며
논단
마당글





[권두언] 영원한 오늘 / 윤정현

작성일 : 2015-02-05       클릭 : 385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첨부파일
영원한 ‘오늘’
 
 
윤정현*
 
요한 17장 2절에 ‘모든 사람’은 희랍어 ‘파세스 사르코스’(pavsh" sarkov")를 번역한 말이다. ‘파세스’(pavsh")는 ‘모든’이라는 말이고, ‘사르코스’(sarkov")는 ‘육체’란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 또는 ‘모든 몸’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 2절은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몸’ 또는 ‘온 몸’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온 몸’에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몸, 즉 온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 하느님의 영과 함께 한 사람, 즉 하느님의 아들은 ‘온 몸’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몸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욕구나 충동에 몸을 맡기면 육적인 사람이 된다. 수신을 잘 하면 마음과 몸을 잘 다스릴 수 있어 본능과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몸과 마음을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게 된다. 영육간의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마음의 독인 탐욕(貪慾), 진에(瞋恚), 치정(癡情)이라는 삼독(三毒)을 극복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삼독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 하늘의 것을 주는 하느님의 영과 함께 사신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오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오늘만을 생각하고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하셨다. 예수님은 일일주의를 사신 분이시다. 참 지혜를 깨달은 사람은 인생의 삶의 참 의미가 오늘 살이(今日生活)에 있다고 말한다. 오늘은 ‘지금(今日)’, ‘여기(此處)’, ‘나(自我)’라는 말이 함께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내가 같은 뿌리이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할 때,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지금’, ‘여기’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今日)’, ‘여기(此處)’, ‘나(自我)’라는 말은 하나이다. 단지 불러지는 이름이 다르다. 즉,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이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나’, ‘지금’, ‘여기’라는 말은 같은 이치요 하나인 것이다.
 
무수한 지점에 광겁한 시간에 억조의 인생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마는 거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그이라 저이라 하지마는 그도 ‘나’로라 하고 살고, 저도 ‘나’로라 하고 살 뿐,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 ‘지금’이다(다석어록).
 
‘나’라고 하면 ‘오늘’ ‘여기’서 사는 사람이다. 오늘 나는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그그제, 그제, 어제로부터 이어서 오늘의 ‘나’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디에까지 연관이 되는가? 낼, 모래, 글피, 그글피로 계속 이어진다(다석어록). 그래서 지금, 여기의 내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늘과 통(通)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온 몸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신비이다.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데, 어떤 하느님인가? ‘살아있는’ 하느님을 느끼고, ‘살아 있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관상가(觀想家)의 삶이다. 예수님이 온 몸을 다스릴 권한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내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몸의 신비를 알고, ‘영원한 오늘’을 사는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은총으로 나의 온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 ‘오늘(today)’, ‘여기서(here)’, ‘지금(now)’ 하느님 앞에 바르게 서야 한다. 그래야 ‘영원한 오늘’을 사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영원한 오늘’을 산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신앙이 시작되고 신앙의 역사는 써져 왔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물고를 트고 생수가 흐르게 하는 일들이 예언자들에서 의해서 그리고 예수님 통해서 완성되었다. 유태교의 왜곡된 신관과 신앙을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으로, 하느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신앙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하셨다. 성 프란시스는 중세의 군림하는 제도교회에 일침을 가하고 섬기는 가난한 교회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6세기 루터와 칼뱅, 츠빙글리는 성직자의 권위와 교권의 종교권력으로부터 성서 안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1830년대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신앙운동은 가난한 자에 관심과 섬김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될 무렵 방향을 상실한 세계교회가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대주교의 역량 하에 하나의 교회로 거듭났다. 에큐메니컬 운동, 즉 세계교회일치운동의 결실이 곧 세계교회협의회(WCC)이다. 이러한 새로운 교회갱신은 “오늘”을 사는 깨어있는 선구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세속화와 물질주의, 맘몬주의의 거대한 파도가 교회 안으로 밀려오고 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세속화의 거센 물결로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제도교회는 인간의 해방보다는 벌과 상을 가르쳐 교인을 제도교회 안에 가둬놓고 있다. 벌의 강조는 두려움과 공포를, 보상은 탐욕과 성공신화의 꿈을 동경하고 무한경쟁의 대열로 인도한다. 공포와 탐욕은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파괴하는 요소이다. 두려움과 탐욕은 자신을 비우고 겸허한 자세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
 
 
오늘 내가 사역하는 교회, 내가 속한 교단은 어떠한가? 우리의 현주소를 성찰하고 진단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설 필요가 있다. ‘지금’(now), ‘여기서’(here), 내(I)가 서야 한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늘과 통(通)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어 온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상태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새롭게 변했다고 해서 우리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신앙을 강조하는 우리 성공회는 같은 신앙을 공유하고 더불어 성장하는 하나인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같이하고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좋은 생각을 모으고 뜻을 같이 할 때, 새로워질 수 있다. 이 공간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함께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
*윤정현 : 청주수동교회 관할사제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세월호 1년]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기 / ... 성공회마당 05-07 424
다음글 [기획 1] 대한성공회를 돌아본다! 성공회마당 02-05 500


 

성공회저널 소개 | 후원안내 | 개인정보 보호정책 | 이용안내
대한성공회 성공회마당    운영자 : 전해주   개인정보관리책임 : 전해주
메일 : jhj5815@hanmail.net    사이트의 모든 권리는 성공회마당 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