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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 / 김동춘

작성일 : 2015-07-14       클릭 : 436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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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
 
 
*김동춘
 
 
1.

20세기 한국인들은 일제 말 전시 동원, 해방 후 좌우 대립과 분단, 한국전쟁, 이후의 베트남 전쟁, 그리고 군사정권의 폭력과 광주 5.18 등의 국가폭력을 체험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기의 대량학살은 가장 비극적인 국가폭력이었다.


한국인들은 유대인 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도 거창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기 국가폭력과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대전 사람들은 지적 간에 있는 대전 산내면 낭월동에서 한국전쟁기 3,000여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대구 인근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2,000여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실을 알지 못하며, 부산 사람들은 전쟁기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영도 해운대 앞바다 등 바다에서 빠트려 죽은 사연을 모른다. 일산 사람들은 탄현 고봉산 자락 금정굴에서 200여명의 일산 주민들이 전쟁기 부역자로 몰려 금정굴에서 학살당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모른다는 것은 사건 자체의 존재를 모른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건 자체에 대해 한번 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그것의 성격과 의미,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자신과 우리사회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는 말도 된다. 즉 국가폭력이나 학살사건이 과거 그 어두웠던 시절의 한 사건으로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박제화되어 지금의 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그냥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르는 범죄 중에서 학살만큼 잔혹하고 도덕적으로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남은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정치 공동체의 삶의 기반마저 송두리 채 파괴한다. 그리고 한 인간집단이 다른 인간집단을 정치, 사회적 이유로 집단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의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증오와 배제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살해 혹은 살해당한 기억, 타인을 학살하거나 자신의 가족이 학살을 당한 기억이야말로 평생 지울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남기에 되고, 그 상처는 일생동안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20세를 집단학살 즉 제노사이드의 세기라고도 한다. 집단학살은 20세기 이전 아니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첨단의 대량살상무기가 도입되고, 전쟁이 총력전의 형태를 지닌 20세기 들어서 학살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고, 따라서 그 피해와 상처 역시 과거역사에서는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학살은 주로 국가, 민족, 인종 간의 전쟁에서 발생하였지만, 국가 내부의 반대세력 혹은 국가를 구성하는 다인종간의 대립에서고 크게 촉발되었다. 럼멜(Rummel)은 1900년에서 1987년까지 1억 5천에서 1억 7천 정도의 인구가 정부나 준정부 조직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20세기 가장 비극적인 대량학살은 나치 하에서 저질러진 유태인 학살(Holocaust)이다. 학살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근대 문명의 야만성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기의 집단학살,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캄보디아의 학살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20세기 들어 많은 학살사건이 발생했으나 한국, 베트남 등지의 정치권력이 이 문제를 공개거론하기를 꺼렸으며, 본격적인 조사 연구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러나 집단학살은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장을 이루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평화질서의 구축의 문제를 논의한다면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할 과제이다.

 
2.

한국전쟁 당시의 대량학살은 이미 전쟁 당시 영국 노동당 기관지인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등 좌파 잡지에 의해 국제사회에 일부 알려졌고, 북한의 언론은 미군과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전쟁 당시부터 계속 비난하면서 공격을 취해오기는 했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쟁 시 학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베트남 미라이(My Lai)의 양민학살, 캄포디아의 킬링필드, 90년대 이후 보스니아, 코소보, 그리고 르완다 등지에서 발생한 학살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한국 전 당시의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외국인에게는 물론 한국인 자신들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미국 측과 한국정부는 인민군, 혹은 좌익의 잔학성을 늘 강조해왔으면서도 이들에 의한 학살 역시 규모나 양상 역시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90년대 이후부터 제주도 4.3사건이나 거창 사건처럼 군의 가해 사실이 확인되고 어느 정도의 정부 차원의 공식 자료가 확인되고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여론에 의해 명백하게 사실이 확인된 경우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진상규명이나 피해자 명예회복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후 2005년 진실사회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진상규명 작업이 이루어졌고, 재심판결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일부 진행 중이다.


1948년 이후 극심한 좌.우 대립과 토벌을 명분으로 한 군경의 양민 학살, 좌.우익 간의 상호 보복을 치른 38이남에서는 10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6.25 이전의 무장 봉기,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은 해방이후 진행되던 폭력과 학살의 전국적인 확산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대량의 인명 피해의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1950년 6월의 전면전은 북한이라는 국가가 남한이라는 국가를 기습적으로 침공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8.15 당시부터 지속되어온 국가건설을 둘러싼 한반도의 정치 갈등과 내전,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후의 폭력의 연장임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체제 존립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많은 민간인을 불법 처형하였는데, 국민보도연맹 관련자와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학살이 대표적이다.  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각 경찰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고, 이들을 살해하면서 후퇴하였다. 공식적 ‘처형’의 외향을 지닌 학살은 이러한 전쟁 발발직후의 초법적인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이나 강화 등 경기 서.북부 지방의 경우 워낙 갑작스럽게 인민군이 내려와서 미쳐 보도연맹원을 구금, 처형하지 못했지만, 경기도의 여주, 평택 이남의 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인민군이 점령하기 이전에 예비구금을 실시하였다.


보도연맹원, 좌익 사건 관련 형무소 수감자,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학살은 거의 전국에서 발생하였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은 大田이다. 당시 대전 형무소에는 4,000여명 이상의 제주 4.3 및 여순사건 관련자들, 남로당원, 보도연맹 예비구금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국방경비법, 특별조치법, 포고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잡혀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7월 3일에서 6일 사이 그리고 8일에서 10일 사이에 각각 살해되었다. 대구, 부산, 전주, 광주, 마산 등지의 형무소 학살 사건 역시 기결, 미결수를 포함한 좌익관련 사범에 대한 불법처형의 중요사례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규모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 대전 이남의 제주도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까지 처형이 이루어졌는데 경남 지역의 피해 규모가 가장 크다.


한편 전쟁초반 한국군에 의해서도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인민군이 후퇴하고 잔류하는 인민군, 빨치산과 국군 간에 산발적인 전투가 전개되던 50년 겨울에 주로 발생하였다. 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가 산청, 거창, 함안지역에 주둔하면서, 인민군의 춘계 공세 이전에 빨치산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작전명령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즉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해서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는 뜻이다. 이 명령에 따라 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2대대는 순천에서 산청으로, 3대대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총 공세를 펼치게 된다. 이들 부대는 본격적인 학살을 벌이기 전에 공비 출몰지역의 가옥을 태우는 작업을 했다. 이것은 49년 겨울 이후 대규모의 빨치산 토벌, 제주도 4.3 사건 이후 제주도에서의 초토화 작전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이 은거할 수 있는 주거지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태워 없애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애는’ 이른바 3진(三盡), 삼광(三光) 작전이었다. 결국 9연대는 山淸.咸陽.거창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피학살자의 대다수는 전투능력이 없는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거창과 산청 사건 이전인 50년 겨울 전남 함평,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서도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南原에서는 공비토벌작전을 감행하던 11사단 9연대 소속 군인들이 대강면 강석리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주민 90명을 대검, 일본도, M! 소총으로 난자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서 70명은 총살당했으며, 19명은 일본도로 목이 잘리는 참극을 당하였다. 남원에서 양민학살이 일어난 이후 12월 6일 전남 함평에서는 월야면 정산리 동촌마을을 시작으로 1951년 1월 12일까지 3개면 9마을의 500여명의 주민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하였다. 인근 나주, 화순, 순창 등지에서도 군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다.


한편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인민군이 북으로 패퇴한 이후 잔류한 부역자들에 대한 집단 처형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인민군과 지방좌익 역시 패퇴하는 과정에서 피수감자나 우익인사들을 처형하였는데, 대전, 서울, 개성 등지에서 광범위한 집단처형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군과 미군이 북으로 올라간 이후 경찰, 지방의 우익단체는 부역자들을 색출하여 이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경기도 강화, 고양, 파주 등지에서의 현지 경찰의 묵인 혹은 비호하게 우익 단체가 좌익 부역자를 처형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사적인 보복의 양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그 실상이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그 규모 역시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역의 이웃 주민들 간의 보복적인 살육이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전남지역이다. 전북지역도 그러했지만 전남 지역의 경우에는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군인들이 물러간 이후 주민들 사이에서 보복적인 학살이 많이 발생했다. 이 보복적 학살은 단순이 좌우익의 이념상의 구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 양반과 상민 간의 신분적 차별, 씨족적인 대립과 갈등이 중첩되어 진행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국가형성기에는 폭력과 학살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전쟁 과정에서의 학살은 미국의 전후일본의 전후 부흥전략, 남한에서의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유지 전략과 직결되어 있었다. 결국 미국이 그리스(Greece) 등에서 그러하였듯이 대 소련 반공전선 구축을 위해 구 파시즘 세력을 재등장시키게 되자, 민족주의 세력 및 민중들에 이들에게 저항하고, 이들 구 기득권 세력이 저항세력의 공격에 직면하여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미국이 이러한 학살의 전 과정을 지휘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전략 그 자체가 이미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예비하고 있었다.

 
3.           

한국전쟁 전후의 국가폭력과 민간인 학살은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極右反共主義과 國家主義가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주의는 ‘반공’이라는 무엇이든지 용서한다는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공산주의(자)는 완전히 없애야한다는 파시즘적 논리였다. 이것을 구체화한 것이 국가보안법인데,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한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이승만 정권의 좌익 척결 작업이 일제말의 사상범 통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보도연맹의 조직이 식민지 시기 관리로서 복무했던 당시 관료, 법조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전쟁 발발 후 그들을 체포한 법적인 근거도 일제하의 예비구금령이었다. 즉 신생 대한민국의 법적, 행정적 지배체제가 식민지 시기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고, 그것이 전쟁 발발 전후 작동하여 민간인 학살을 뒷받침하였다.

일본 군대의 문화가 일군출신으로 구성된 한국 군인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었다. 구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군은 곧 천황의 군대였으므로 민주국가에서처럼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일제 식민지 군인과 경찰들은 철저한 기술관료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기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해방 후 한, 국군의 지휘부를 차지한 일본 군 출신들은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 경찰 역시 일제 시 배운 고문과 폭력행사의 습관을 그대로 몸에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일제시대에 그러하였듯이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고문과 폭력이 이루어졌다. 군과 경찰의 이러한 야만적 고문과 학살방법은 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의 각종의 80년 5.18 당시에 또 한 번 재연된 바 있다.


지금까지 학살과 국가폭력은 언제나 안보, 문명과 자유와 시장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지만, 그것은 많은 제3세게 민중들에게 깊은 상처와 굴욕감을 안겨다 주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다수의 무관심한 대중들은 자신의 경제적 복리를 누리는 대가로 이러한 이웃의 희생에 대해 눈을 감아왔다. 우리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캄보디아, 네팔 등지에서 발생한 학살과 국가폭력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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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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