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마당 4호 제작비용 및 후원 현황(7/1-10/31)
시론
특집글
살며 생각하며
논단
마당글





4차 산업혁명과 종교의 미래 존재 양식

작성일 : 2017-03-31       클릭 : 274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첨부파일

​​​​​4차 산업혁명과 종교의 미래 존재 양식

 

*김대식​

1. 프랑켄슈타인적 기우?

 

“이 대지는 피부로 덮여 있다. 그런데 이 피부는 여러 가지 병으로 신음하고 있다. 그 병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라는 존재다.”-니체(Friedrich W. Nietzsche)

 

  “뤽의 살가죽이 갈라졌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서는 피 한 방울 솟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살 속에 적갈색 털로 살짝 덮인 채 감춰져 있던 뚜껑을 열고 인공 심장을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그 인공 심장을 뤽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서 소리쳤다. 이런 걸 달고 있는 주제에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지? 내 앞에 있는 당신은 한낱 기계일 뿐이면서 감히 다른 기계들을 심판하고 있어! 나는 당신 집에서 <살아 움직일 수 없는 물건들이여, 그대들에게 영혼이 있는가?>라고 혼잣말처럼 물었어. 하지만 내가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거야.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이여, 그대들에게 진정한 영혼이 있는가? 그녀는 팔딱거리는 빨간 기관에 눈길을 붙박고 있었다. 뤽도 자기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것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소설 『나무』는 프랑스에서 2002년에 출판된 바로 다음 해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의 소설이 환상적인 성격이 강하기는 하지만 작품 곳곳에 반전의 장치들이 내재되어 있어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이다. 위에 인용한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의 일부분에서 이미 오래 전 지구상에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세계를 반전의 묘미를 살려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미래의 세계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 전세계는 누가 4차 혁명을 주도하느냐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4차 혁명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면 경제적 낙오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당장 4차 혁명이 현실화되면 수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질 것이며, 그 중에서 의사, 약사, 교사 등이 먼저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외로 나가 있는 기업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전술적 경제 화용론(기실 이것은 언어철학자 오스틴[J. L. Austin]의 논지를 빌린다면, 지배적 발화수반행위 혹은 발언내적[illocutionary] 언어 행위에 가깝다)을 구사하고 있다. 공장에서 사람을 쓰지 않아도 거의 인건비가 들지 않는 생산시스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다시 독일로 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아디다스 신발업계도 스마트공장을 세워 놓고 고급 관리직 160명만 고용하고 모든 직접생산은 로봇에게 맡긴다는 전략이다. 

  이로 인해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예측가능하다.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직원들은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마존은 계산대를 아예 없애고 아마존 고를 만들어 시범 가게를 운영한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자율주행차가 시험단계를 넘어 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셔틀버스 기사들은 절망적이다. 아파트 경비원들은 택배까지 대신 받아주는 보안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는 상황이라 4차 혁명의 직격탄을 맞을 것은 뻔하다(이경재, 경제평론가). 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이 좀 더 구체화되어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로 직장을 잃고 삶이 어려워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창의적이고 융복합적인 사고를 갖기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공지능도 할 수 없는 틈새는 단편적이고 전문화된 직업군이 아니라 이제는 다양한 지식을 서로 연결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종합적·협력적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고착화된 지식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지식, 새로운 도그마, 새로운 가설이 나올 경우에는 열린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서울대 이정동 교수).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변화에 가장 취약한 영역이 종교분야이고,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직업군인 종교전문가(특히 신학자)와 종교직업군(일명 성직자)에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종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칼 브라텐(Carl E. Braaten)은 현대인에게 있어 관심사는 신학자들이 말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신학자도 아직 무엇인가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적 인식론에 대한 명료한 해명은 고사하고 아직도 답보 상태인 종교적 어젠다조차도 접근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4차 혁명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해석학적·교의학적 근거를 모색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2. 프로메테우스인가? 에피메테우스인가?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니체(Friedrich W. Nietzsche)

 

  앞으로 인공지능이 보편화된다면 종교절대주의는 붕괴될 것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한다면 교회절대주의는 이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고백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교회는 그 고백의 주체가 자신인가 아니면 특정 종교의 권위주의자 혹은 권력적 제도나 체제인가를 따지는 경향성이 있지만, 앞으로 이 고백이라는 것도 ‘주체적 자기 고백’에 의해서 효력이 발생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회의 일원이 되거나 일정한 종교의 구성원이 되는 절차를 그 종단의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포스트 영성시대에는 인공지능이 등장함으로써 그 역할이 의미가 없게 된다. 자기 학습과 자기 고백이 가능해지는, 심지어 과거의 그리스도교 역사와 체험에 대한 기억들이 가능해지는 인공지능은 교리적 고백에 대한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자유로워질 것은 자명하다. 

  종교는 고백을 공유하고 과거의 기억과 체험에 의해서 정체성을 공고히 해왔다. 하지만 동일성(동일한 것)을 기억하고 고백한다고 해서 정체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교의 기억이라는 것도 다양한 기억들 중에 하나요, 그리스도교의 유사한 종단들의 기억들과 그리스도교 내부의 구성원의 기억들도 다양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교의 기억이라는 것도 여러 기억들 중의 하나의 기억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억이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기억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인공지능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리스도교의 기억과 고백을 공유하고 생산, 소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정체성이 곧 소속감이라는 착각을 하듯이 중세와 근대의 정체성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운운하면서 여전히 인간적인 배타성을 고집한다면 정체성(正體性)은 곧 인간과 종교의 정체화(停滯化)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도 자기 인식과 자기 학습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고 세례받기를 원한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교리적·신학적 인식과 해석을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기계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신체적인 질적 요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안 된다고 배척·배제하는 기계 나치주의적 판단을 내릴 것이라면 더 이상 그들과 대화하고 공존하겠다는 의지는 없는 것이다. 오로지 종교 공동체의 일원은 인간밖에는 안 된다고 속단하며 인간 파시즘으로 일관한다면 교회는 아직도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세상에 대한 교회의 인식 변화와 대화, 즉 적응[aggiornamento])조차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동물이 인간에게 동반자요 반려자 역할을 한다는 관념이 생소하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된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동물은, 특히 개는 바깥에서 길러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도 안방의 주인과 나란히 잠을 자고 옷을 입으며 병들었을 때는 사람만큼이나 비싼 치료를 받는다. 심지어 죽었을 때는 인간의 가족처럼 성대한 장례식까지 치러주며, 특정 종교에서는 반려동물의 축복식과 장례미사를 거행하는 경우도 있으니 인간의 인식의 확장과 전환은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전례 중심의 일부 종단은 단순한 물질적 대상, 양적인 기계적 대상인 차량축복식도 있으니, 사실 그것도 생물(?) 취급을 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물며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열린 사고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그러므로 경계를 무너뜨리고 포용적 종교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 교리, 신학, 전례 등에 대한 총체적 재해석과 새로운 정립이 요청된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 안에 성적 소수자, 장애인, 가난한 자 등을 아직도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대한 인식과 실천의 장치들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인공지능을 위한 종교적 교리와 신학, 종교적 인식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인간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긴밀해야 할 것이다. 

 

3. 프로메테우스적 인식을 향하여

 

“새로운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주위로 세계는 돈다. 소리없이 그렇게 조용히 돈다.”-Friedrich W. Nietzsche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삶이 경쟁이라는 하나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다. 우리의 집단적 에너지는 전부 하나의 목표, 즉 살아남기 위해 모든 타인과 싸운다는 목표에 징집당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의 말이다.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과 경쟁을 해야 한다. 아니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은행, 마트, 신문기자, 운전기사 등 앞으로 이러한 경쟁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럼으로써 네오 러다이트 운동(Neo-Luddite Movement)을 더 강력하게 전개하자는 사람도 나타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미시적 파시즘(우리의 일상에 미세하게 작동하는 파시즘: 배제, 차별, 혐오, 편견, 증오 등)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 이기주의를 가지고도 살아갈 수 없다. 인종차별주의, 생명차별주의를 넘어서 기계차별주의까지 극복을 해야 한다. 결국 기술과 인간, 기계와 신학, 기계와 종교의 관계-기술철학이나 기술신학 혹은 기술종교학적 차원의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에서 기계를 만들어 내는 주체는 인간의 주체적 의식과 의지의 문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인공지능이라는 특수한(특이한) 존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차이와 모순, 연대와 관계를 통한 ‘포스트 영성 공동체’ 더 나아가 ‘보편적 정신(이성)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모순된 존재이지만 모순이 사회를 바꾸는 사회구조적 혁명과 특수성(특이성)의 출현이 공동체를 바꾸는 분자혁명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올해가 종교개혁(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교회쇄신’이 맞는 표현이다) 500주년이라고 홍보하면서 그간 그 수혜를 누려온(?) 여러 종단들은 그들의 창교자들을 떠받들기 바쁘다. 그런데 지금 당장 생각해봐야 할 것은 앞으로 10년, 멀리 내다봐서 100년 후의 종교 모습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일이다. 소프트웨어와 사회의 미래에 관한 글로벌어젠다위원회가 2015년 3월 글로벌 정보통신기술 부문 고위 임원과 전문가 총 8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에는 인체삽입형 모바일폰이 등장하고, 인구의 80%가 페이스북 등에서 디지털 정체성을 갖는다고 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구조사를 위해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최초의 정부가 나타날 것이며 블록체인을 통해 세금을 징수하는 최초의 정부가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또한 10%의 인구가 인터넷이 연결된 안경을 쓸 것이고 인구의 90%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2026년에는 기업의 이사회에 인공지능 기계가 최초로 임원이 된다고 하니 공존과 인정, 공생이라는 말은 더 이상 무색할 것이다. 

  이정동 교수가 “가수, 시인, 기업인으로서 각각 다양한 지표를 인정하되, 다만 모두가 자기 분야에서 ‘심층’을 가질 때 새로운 것이 축적될 수 있다”(한겨레, 2017년 1월 23일, 12-13면)고 한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종교는 종교로서의 심층, 특히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을 더 깊이 연구하고 인간과 삶의 관계성을 피상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읽는 눈을 명징하게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4차 혁명과 함께 새로운 종교혁명을 희망한다면 종교는 연대, 상호인정, 정신의 성숙을 꾀해야 한다. 그래서 지구촌의 시민구성원의 생태계를 새롭게 재편성하여 인간 공동체를 넘어서 지구 공동체 전체의 성숙과 진보를 바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될 것이다. 게다가 기계 혹은 인공지능자본주의로 인한 기술계급사회가 정착되면서 그들을 독점·선점하는 새로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대립될 수도 있다. 종교는 이런 문제를 예견하고 4차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계급의 억압, 폭력, 생태계 파괴, 전쟁 등에 대해서 저항하는 윤리와 대안 정신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도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고착화된 종교 공동체, 나의 종교, 혹은 나의 종단만이 아니라 더 광범위한 형태의 종교 간의 연대와 이해, 그리고 포용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환대, 곧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환대를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인간 스스로 학습하면서 그 깨우침과 공감을 통하여 인공지능에 대한 환대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한다. 유기체적 인간이 질적인 몸을 가진 타자를 환대하지 못하면서 인공지능을 타자로서 환대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 오히려 미시파시즘에서 빠져 나와서 이제 새로운 문제로 거론될 거시파시즘에 대한 종교적 인식과 정책을 구상해야만 한다.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인간의 주체성과 감수성, 그리고 창조와 발명을 가능케 하는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만큼 남았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모순과 대립(반정립)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어떻게 종합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 자신, 종교적 측면에서는 종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자칫 자본가가 선점한 기계에 의해서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인간이 아닌 인간 자신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계가 단순한 인간의 수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동반자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대립과 모순에 따른 차별과 지배가 아니라 평등과 공존을 추구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필자는 글을 쓰고 대학 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지 오래 되었다. 이 삶이 언제나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실존적 현실도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종교직업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기억들을 학습하고 공유한 인공지능들이 목사, 승려, 신부가 될 그날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이 사태를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거부할 것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 그리고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공동체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종교는 미국의 두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나 리처드 로티(Richard M. Rorty)가 주창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 토대를 둔 ‘생성적 고백공동체’ 혹은 ‘끊임없는 자기 고백의 재서술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종교도 진리의 유용성, 실천력, 문제 해결 능력, 사회적 인정, 대화와 타협, 맥락중심적인 특이하고도 독창적인 관점이 없다면 대중의 설득력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김대식 : 종교학(종교생태학과 생태종교학)과 철학(칸트철학)으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의 종교학과와 철학과에서 비정규직 강사로 있으면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종교연합(URI-Korea) 지도위원,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지중해학 성서해석 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식탁의 영성》(공저),《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생태영성의 이해》,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종교 간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과 유동적 종교>, <종교와 이성 사이: 종교 경험의 토대주의 비판>,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생명미학적 정치>, <함석헌의 평화사상>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현상학적 인식론과 존재론, 환경철학과 정치미학, 아나키즘의 담론과 실천,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성공회대 졸업생이 말한다 / 강석금 성공회마당 07-14 304


 

성공회저널 소개 | 후원안내 | 개인정보 보호정책 | 이용안내
대한성공회 성공회마당    운영자 : 전해주   개인정보관리책임 : 전해주
메일 : jhj5815@hanmail.net    사이트의 모든 권리는 성공회마당 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