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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읽기] 구약으로 세상읽기 / 김예성

작성일 : 2015-12-02       클릭 : 283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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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으로 세상읽기
 
 
김예성
 
 
너도 사람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에누마 엘리쉬를 처음 보았을 때 무척 힘들었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는 길가메시나 에누마 엘리쉬와 너무 닮았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주부전의 근원 설화가 있다는 걸 국어시간에 이미 배웠다. 이제 할 일은 그저 이것은 이것과 닮았네, 저것은 저것을 닮았네 뿐인 것 같았다. 하나라고 여겨졌던 것이 각각의 역사적 증거에 따라 나뉘었다. 증거라고 주어지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을 수가 없다. 내가 알던 것과 너무 다르다. 자료를 쌓아 두고 몇 날을 보내다. 그러다 “하느님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지 않았어. 하느님은 우리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분이지, 제 고통에 소리친다고 쓸어버리는 분이 아니야”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같은 소재, 같은 틀로 이야기를 전개해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사람을 무엇이라 할까?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에는 수메르인의 인간관이 잘 드러난다. 수메르인이 보기에 사람은 높은 신을 대신해 힘든 일을 하는 존재이다. 아주 옛날에 지위가 낮은 신들은 홍수를 방지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노역을 하였고 큰 신들을 그들이 하는 일을 그저 지켜보며 쉬었다고 한다. 일은 힘들어지고 게다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작은 신들은 연장을 부수고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지하수의 여신 남무는 지혜의 신인 아들 엔키에게 작은 신들의 일을 대신할 사람을 만들라고 한다. 즉, 사람은 노동을 위해서 태어났다. 만들기는 신이 만들었지만 번식은 인간의 몫이다. '아트라하시스의 태초 이야기'에는 그 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파 여신들은 인간을 축복하였고 사람들은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사람들은 호미와 삽을 만들어 큰 운하를 팠다. 600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사는 땅은 넓어지고, 사람들은 많아졌다. 그리고 땅은 황소처럼 울어 댔다. 다시 반란의 조짐이 보인다.
신들은 불안해졌다. 바람과 땅을 관장하는 엔릴은 외치는 소리를 듣고 큰 신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소동으로 쉴 수가 없다. 역병을 일으키자고 소리친다. 다시 600년이 흘러 같은 일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곡식을 줄여 사람들을 없애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홍수로 사람들을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들었던 엔키(에아)는 아트라하시스의 꿈에 나타나 배를 만들어 홍수를 피하라는 말을 전하여 재앙을 피하게 한다. 이야기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높은 신, 낮은 신, 그리고 낮은 신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드러낸다.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자는 군소리 없이 그저 운하를 파야 한다. 운하를 파지 않으면 물이 넘치고 물이 넘치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운하를 파다 운하 속에 묻혀 죽을 인생이 바로 힘없는 사람들이란 이야기이다. 힘들다고, 도와 달라고 소리치면 소리를 들어 보지는 않고 그저 소리를 덮기 바쁘다. 뭐라고 나무랄 수도 없다. 원래 하천 바닥을 파려고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계약을 생각하시는 분이다. 야훼는 수메르 신의 대척점에 서 있다.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을 부려라!”(창1:26)
 
물론 타락 이후 노동은 천형(天刑)으로 여겨질 만큼 가혹하게 그려진다. 긴 가뭄을 피해 들어간 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의 삶은 점점 나빠졌고 그 상황은  '그 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집트의 왕이 죽었다. 이스라엘백성은 고역을 견디다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라는 출애굽 2장 23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생각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굽어 살펴주셨다(24, 25절)라고 한다. 아프면 남은 몰라도 자신은 안다. 그러나 남의 고통은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남의 고통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남의 고통을 제 고통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일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일하려 태어난 사람일까? 아니 사회는 우리를 일하는 사람으로 볼까 아니면 일하려고 태어난 사람으로 볼까? 책에서는 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일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실현한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일을 시키는 이에게 우리는 그저 자원이다. 늘 다른 것으로 교체 가능한 자원 말이다. 신화의 시대에서 운하를 파다 흙더미에 깔려 죽을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면 시끄러워 쉴 수 없다고 말하고 다 쓸어버리려 한다. 수 천 년 전 문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통찰이다. 그리고 노동 여건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이다. 사람 보는 눈이 바뀌지 않았고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들어서 좀 살게 해 달라고 하니, 살게 해주겠다며, 아버지의 일자리와 아들의 일자리를 맞바꾸자고 한다. 그리고 힘들다고 들고 있던 삽이나 호미를 놓으면 그 고통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냥 집에 가라고 하고 삽을 들었던 손에 손해배상 청구서를 쥐어 준다. “이것들이 편하니까 딴 생각을 하는 구나.”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벗게 해달라고 갔던 백성들이 들은 소리이다. 이런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를 배워 아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그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분명히 하느님은 사람을 신을 위한 도구, 신의 허드렛일을 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리를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대하지 못할뿐더러 수단으로 이용되지 못해 안달이다. 어차피 현대사회가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자원으로 보니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그래도 거룩하게 살기
 
답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기는 힘들다. 레위기 19장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정이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문장을 소개한다. 9절과 10절, 13절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고, 15절은 공정한 재판을 그리고 33절과 34절은 외국인을 보호를 위한 규정을, 35절과 36절은 공정한 거래에 대해서 말한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따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 빼앗아 먹지 마라.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지 마라(레위19:9,10,13).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영세민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15절).


너의 땅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괴롭히지 마라. 너에게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아껴라. 너희도 이집트 나라에 몸 붙이고 살지 않았느냐?(34, 34절)

너희는 재판할 때나 물건을 재고 달고 되고 할 때에 부정하게 하지 마라. 바른 저울과 바른 추와 바른 에바와 바른 힌을 써야 한다. 나 야훼가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 하느님이다.(35, 36절)
 
제 밭에서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배려하라는 구절은 대기업 총수에게 이익을 돌리고자 국민의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정부와 무분별하게 골목 상권을 침범하는 대기업을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한 때 나그네였던 것을 생각하여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얘기는 배려이고 자기를 확장하는 행위이다.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다.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프다. 이것을 아는 게 배려이다. 배려 없는 극한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남을 딛고 올라서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지를 생각해야 한다. 피죽이라도 먹어야 일을 하고, 그래야 착취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최소한 밟고 일어서려 해도 밟힐 무엇이라도 있어야 밟을 수 있지 않은가? 이미 옛 이야기는 그렇게 말한다. 아트라하시스의 태초이야기에서는 사람을 없애기로 한 신들도 제사 지내 줄 이가 없어 며칠을 굶었다. 홍수가 끝나고 아트라하시스가 소와 양을 잡아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니 신들을 냄새를 맡고 제물 주변으로 파리 떼처럼 모여들었다. 제물을 먹은 후, 홍수를 일으켜 사람을 파멸시키려고 한 자신들을 원망하였고 전한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나락은 베고 죽는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을 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장사꾼은 손해가 되면 모든 걸 팔아 버리고 떠나버린다. 그들은 땅에 매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가 아니면 다른 곳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다며 오늘 품값을 내일로 미루고, 깎는다. 많은 데서 한 숟가락 더는 것과 없는 데서 한 숟가락 더는 것 다른 일이다. 힘들다고 소리치면 있던 것 마저 빼앗는 모습이 벽돌을 굽던 이스라엘에게  짚을 빼앗은 파라오를 닮았고, 힘들다고 찾아간 솔로몬의 젊은 아들 같다. 씨나락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성서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신명기25:4)고 했다.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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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성 ┃ 충남 계룡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신학(구약학)을 전공했고, 여기저기 지방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칼럼을 쓰고 있는 자유기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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