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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화신석

작성일 : 2017-03-31       클릭 : 147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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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신석世話新釋3

 

늙어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장인용

우리 또래 친구들끼리 만나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늙음과 앞으로 얼마나 더 살 것인가다. 친구들 이야기는 우리 시대는 이제 120세는 거뜬하지 않겠느냐는 낙관론이 대세다. 의학은 나날이 발전하고, 또 과학이 발전하면 노화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낙관론의 근거다. 몇 십 년 전부터 현대의학은 암을 금세 정복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수십 년이 흘러도 조기 발견과 생명 연장 빼고는 암을 정복했다는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에는 지나친 항암치료 때문에 전보다 더 괴로워하고, 암보다 항암치료를 못 이겨 죽는 일도 흔한 것 같다. 

또 과학의 발전이 노화의 근본 원인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그리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전자의 끝에 세포의 복제 횟수가 텔로미어 길이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에 발견했지만, 세포분열의 횟수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요원하며, 사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조차 모르고 있다. 과학이 곧 혁명적인 수명 연장의 방법을 내놓는다는 이야기는 늘 있었지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실현된 적은 없다.

 

수명을 늘린 것은 영양과 위생이다

실제로 불과 백 년 전만하더라도 50이면 노인이고, 60이면 환갑잔치를 할 만한 경사스런 일이었고, 70이면 드문 일이라 했는데, 이제는 80이 일상이다. 그만큼 평균수명은 증가했고, 거리에는 노인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수명이 증가한 원인으로 의학의 발전을 꼽지만, 사실은 의학보다 더 기여한 것은 영양과 위생이다. 우리는 예전보다 잘 먹고, 몸도 깨끗이 씻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장수의 원인이지 별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그리 잘 먹는 사람만 삼시세끼를 잘 챙겨 먹었을 뿐이지, 나머지 대부분은 밥만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했다.

위생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스트레스 해소와 오락의 차원으로 목욕을 하지만 못 살던 시절에는 계절에 한 번,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겨울에 더운 물로 세수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히 겨울에 빨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해야 했으며, 빨랫줄에 얼어붙은 채로 몇날 며칠을 말렸다. 그랬으니 겨울이면 옷을 자주 갈아입을 수도 없었고, 어린아이들은 시커멓고 손등이 튼 채로 겨울을 나기가 일쑤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영양과 위생상태는 뛰어나게 좋아졌다. 영양부족에서 영양과잉과 살이 찌는 과체중을 걱정하고, 잘 먹어 생기는 성인병을 걱정한다. 위생상태도 너무 좋아져서 겨울에도 매일같이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머리를 감으며 사니, 수명이 늘 수밖에 없다.

물론 의료의 보편화가 수명을 연장시킨 것은 사실이다. 일단 신생아사망률이 급격하게 낮아졌고, 어린아이들이 예방접종을 통해서 유아사망률이 급격히 낮아졌기에 평균수명이 늘어났다. 예전 같으면 쉽게 죽었을 전염병의 치료가 가능해지고 항생제로 병원균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도 수명연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의술의 진전으로 장기이식이 가능해지고 심혈관계의 여러 질병들도 처치할 수 있었으니, 의학이 수명연장에 공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개 질병의 치료로 인한 수명 연장은 고작 몇 년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아직도 많은 불치병들에는 손도 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쨌거나 이 세 가지가 인간의 수명의 연장에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 이제 백세를 넘기는 노인은 흔해졌으며, 평균치 되는 사람도 80은 산다. 이미 고령화와 노인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코앞에 닥쳐 있으며, 건강한 120세의 삶은 바로 내일모레라고 한다.

건강한 노년은 희귀하다

그러나 지금 60대의 사람이 120은 거뜬히 살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양상태의 개선과 위생적인 생활의 혜택은 이미 다 누렸으며, 오히려 당뇨병이나 심장과 혈관의 질병과 같은 영양과잉의 부작용이 건강을 해친다. 의학 기술의 발전도 급격한 혁명적인 성과가 나타나기는 쉽지 않다. 줄기세포로 노화된 기관을 대체하는 방법이나, 암을 바이러스를 이용해 유전자적으로 고치는 방법들이 떠오르고 있지만,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직은 짐작할 수 없다.

그 모든 장애물을 일이십 년에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순조롭다 하더라도 몇 가지 부작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더군다나 시술의 비용이 얼마나 들지 짐작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그렇게 연명하는 삶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더더욱 없다. 

현재의 의료 기술로 노화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노화는 우리의 장기뿐만 아니라 근육과 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진행된다. 그렇게 많은 부위를 전부 교체해가며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그렇다면 이런 상태로 영위하는 삶이란 병과 고통으로 점철된 것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수명이 제한된 것은 암수 분화가 일어날 때부터 환경 적응을 위해 자연이 마련한 법칙이다. 성별이 있고 그 두 유전자가 합쳐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간에 성별이 있는 생물이 영원히 사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터무니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하는 자체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장수는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장수는 우리 사회와 우리 후손들까지 위태롭게 만든다. 건강치 못한 삶을 오랫동안 영위한다면,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만 괴로운 게 아니다. 이 사회나 개인들은 건강치 못한 사람을 돌보고 그들을 먹이는 데 많은 힘을 낭비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에도 바쁜 데, 거기다가 이들 노년층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어, 등골이 휜다. 또한 그들도 오래 산다면 그들의 자손들도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가령 평균수명이 120살이 되고, 제 손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나 80세까지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80세부터 120세의 시간은 40년이나 된다. 요즘은 부모가 돌봐야 할 학습기간도 길어져 늦으면 30이 되어야 돈을 벌고 독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30에서 80세까지 50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이 나머지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의 70년을 책임져야 한다는 계산이다. 어찌 이들의 등골이 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들의 괴로움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이 지구에서 가장 소비가 왕성한 동물 종이다. 다른 동물들은 그저 먹이를 섭취하고 자신의 몸을 움직여 다닐 뿐이지만, 인간은 음식을 먹는 데에도 다른 에너지를 이용해 익혀 먹는다. 그뿐이 아니라 밤의 시각적 보조용으로도 불을 밝혔으며, 난방을 불을 피워 했으며, 가축을 키워 다른 동물의 에너지를 이용하기도 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더욱 확대되어 수억 년 동안 축적했던 지구의 화석연료를 동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석탄과 석유에 이어 진흙층에 들어 있는 것까지 짜내고 있다.

그런 인류가 120을 건강하게 산다면 이는 후손뿐만 아닌 지구의 재앙이다. 그 많은 에너지를 끊임없이 소모해가며 산다면, 그것은 공멸을 뜻할 것이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하다

인간이란 종이 이 세상에 탄생한 이래로 영원히 산 사람은 없다. 전설에는 삼천 년도 살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120을 넘어 산 사람은 없다. 주변을 보면 100세를 넘긴 사람도 0.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아니 일찍 병사하거나 아니면 노년에 치매로 고생하는 노인들이 더 많다. 나만이 고통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는 희망은 대부분 덧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도 생에 애착은 가지고 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돼지들은 슬픈 눈물을 흘린다. 야생의 동물들도 생존투쟁에 있어서 인간 못지않은 투지를 보인다. 그러나 노년의 쓸쓸함과 고통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듯싶다. 인간이 그러지 못하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젊은 시절의 화려했던 기억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요즘 과학기술의 현란한 성공이 주었던 기억들은 우리의 삶과 젊음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다는 착시를 품게 한다. 그러니 그런 과학기술은 인간의 욕심이고, 실제 그 욕심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지 모른다. 실현될 수 없는 욕심을 쫒느니 욕심을 버리고 현실에 순응함이 올바른 선택이다. 고통스럽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일찍 죽는 것이 낫다.

 

내 젊은 시절을 인정해 달라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버리기 어려운 존재라 노인이 되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노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고, 자신의 과거에 이상향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춰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변화의 속도가 느린 사회였으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또 오히려 많은 경험으로 존중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변화의 흐름이 빠른 요즘은 그것이 세대 간의 단절과 충돌로 나타난다.

그래서 요즘 노인들 가운데 일부가 요즘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나이를 무기 삼아 젊은이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 일부 노인들도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막무가내로 학생들이나 특히 어린 여학생, 젊은 여자들을 다그쳐 자리를 빼앗기도 하고, 어른이 앞에 섰는데 조는 척 한다고 지팡이로 특특 건드리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술이 취해 다짜고짜 젊은이를 향해 고함을 치기도 하고, 극우파의 시각이 담긴 언설을 승객을 향해 큰소리로 퍼붓는 노인들도 심심치 않게 본다. 이들은 누가 나이를 더 먹었는지 같은 노인들끼리 시비를 벌이기도 하고, 젊은 임신부가 ‘경로석’에 앉았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소수면 ‘별별 노인도 많다’하고 지나가겠지만, 거의 일상적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들은 가난한 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궁핍함과 사회와 가정에서 대접 받지 못하는 서러움을 익명을 가면으로 쓰고 불특정 다수인 지하철과 버스의 승객을 대상으로 분풀이한다. 또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어버이 연합’이란 요상한 이름의 단체로 촛불집회에 어깃장을 놓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들이 돈 몇 푼에 팔려서 한다고 하지만 노인에게도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일은 그 몇 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의 처지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년 시기에 전쟁을 겪었거나, 아니면 전쟁 직후의 헐벗은 세상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고 자랄 수 없었다. 가난하고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썼으며, 어느 정도 성취도 이뤘고 열심히 돈을 벌어 자식들도 키웠다. 그렇게 계속 먹고 살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경제위기가 닥쳐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나이 들어 직장서도 밀려나고, 자식들은 저마다 먹고살기 바쁘고, 자신들의 노년은 다시 춥고 가난한 세계로 귀환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기반을 마련한 것 같은데 자신들은 빈털터리에 늙고 여기저기 아픈 몸이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젊은 시절의 노력을 인정해 달라고.”

 

서로의 조화로움을 위하여

점점 더 늙어가는 노령화 사회에서 노인들이야말로 인간의 이중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편으론 건강하게 더 오래 살고픈 욕망과, 젊은이들이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부딪친다. 그래서 자신들이 어른들에게 억눌리면서도 잘 대접했다 여기고 그렇지 않은 현실을 탓하는 것이다. 자본의 욕망은 진시황의 영생불사의 묘약을 기대하게 만들고, 가난한 노인들은 그들 과거라도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 두 욕망과 기대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위배할 수 없듯이 세월은 이 육신의 영속을 허락하지 않고, 다시 다음 세대로 모든 것을 잇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멀지 않아 늙을 것이며, 다시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인생의 뒤안길로 흩어질 것이다. 지금의 모든 기억들은 30년만 지나도 빛이 바래고 퇴색되어 있을 터이다.

그러기에 젊은 세대는 현재가 어렵더라도 노인 세대들의 아픔을 감싸 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게 돌보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만 제대로 되어도 비이성적으로 촛불에 태극기로 대항하는 노인들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또한 지금의 노년들은 노욕과 분노에 눈이 멀러 젊은이들을 탓하고 핍박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들의 지난 기억들은 조용히 내려놓고, 앞으로의 세상은 앞으로를 살아갈 젊은이들 손에 칼자루를 쥐어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이든 사람의 혜안은 이런 인생의 경험을 통해 오고 갈 때를 잘 가리는 데 있다. 그렇게 이 세상과 조화롭게 살다 이 세상을 떠나야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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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용 : 도서출판 지호 대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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