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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읽기) 하느님과 꽃길/김예성

작성일 : 2017-03-31       클릭 : 122     추천 : 0

작성자 성공회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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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꽃길

​김예성

열왕기 상은 ‘아합왕이 이스라엘의 어느 선왕들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으며(왕상16:30),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에게 가서 그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31)’고 전한다. 그는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짓고 그 안에 바알 제단을 세웠으며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다.(왕상16 :30, 31, 32, 33)

고대 가나안인들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믿던 주인인 바알은 풍요와 폭풍우를 관장하는 남신이다. 이스보셋(아세라)은 바알의 반려자로 등장한다. 아합이 바알 산당을 세운 건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주요 산업이 목축이 아니라 농경으로 바뀌었으니 그에 맞는 신을 찾는 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엘리야는 가뭄을 예언하였고 가뭄이 들었다. 비를 내리지 못하는 바알이 어떻게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바알은 풍요의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러면 바알이 아닌 야훼를 믿으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니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에 맞게 내려주시어,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게 해주시고 들에는 너희 가축이 뜯어먹을 풀이 자라나게 해주실 것(신명11:14, 15)’이라지만 심판도 우리가 받을 몫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해피엔딩을 말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 고생을 하더니 잘 먹고 잘 산다고 하지 않는다.

하바꾹 선지자의 말을 보자. 구원을 받았다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하바꾹3:17, 18).

야훼는 꽃길을 주지 않는다. 그가 이끄는 길은 고생길이다. 분명히 엘리야는 바알과 싸워 이겼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수 백의 바알 선지자를 죽였지만 그는 여전히 도망자이다. 옳은 일을 했는데, 그것도 그들이 믿었던 야훼 이름으로 바알 선지자를 죽였는데도 아무런 보상이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 상대가 아무렇지 않다면 덜컥 겁이 난다. 도망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그는 유다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곳에 시종을 남겨두고 자기는 하룻길을 더 여행하여 거친 들로 나갔다. 싸리나무 덤불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아래 앉은 그는 죽여달라고 기도하였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왕상19:3,4)

기도하다 지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고, 그 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라는 말을 들은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그가 동굴에 이르러 밤을 지낼 때 야훼의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같은 질문과 대답이 두번 반복된다.

야훼는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왕상19:9)고 물었고 엘리야는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고 대답한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는 소리가 들렸고 큰 바람, 지진, 불이 그 앞을 지나갔다. 바람, 지진, 불은 시내산에 나타난 야훼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곳에 야훼는 없다.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왕상11, 12a)

그리고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왕상12b),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 결국 엘리야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다마스쿠스 광야로 해서 돌아가거라. 다마스쿠스 성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을 기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님시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기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5, 16).”

광장에 100만이 넘실거릴 때,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 헌법이 말하는 국민 주권이 곧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한 마음과 불안만 더해간다. 분명히 옳은 일을 했는데도 더 힘들어질 것 같다. 야훼가 아니라 바알 앞에 줄을 서야 했나?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끌고 가는 건, 바람도 아니고 지진도 그리고 불도 아니란 말이다. 돌아가서 다음 예언자를 세워야 한다. 작은 힘이나마 다시 광장에 서서 그 불안한 오늘을 견뎌내야 한다. 그 길은 광야로 해서 돌아가는 고생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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