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앙갚음을 당할까 두려워 요셉에게 아버지께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알지만 오히려 하느님께서 좋게 일을 꾸며주셨다고 말하며 두려워 말라며 자녀들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형제들은 가슴이 터질 듯 감격합니다. 오늘 성서는‘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써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자신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이루어지려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한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마태 6, 12 5, 43-48 참조)”하신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회개하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7, 5). 용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23-34절에 있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더욱 풍부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엄격히 말해 사실일 수 없기 때문에 비유적 해석(알레고리)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나 되는 돈은 거의 터무니없는 액수입니다. 이 돈이면 작은 나라, 헤로데가 다스리는 정도의 나라 몇 년치 전체 예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돈은 로마황제라도 탕감해 주기 어려운 액수입니다. 이러한 과장법은 전능하신 하느님은 한없는 능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한 만큼 우리가 범죄하는 것도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구도 공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용서가 베풀어진다면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일 따름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들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여쭙자 주님은 무한대라고 가르치시며 하느님 나라를 비유의 말씀으로 전하십니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루가 7 : 43)진실로 형제를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임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느님의 자리에 서지 않고 형제들을 품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로가 로마의 교우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하듯이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심판의 자리, 곧 하느님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정의로운 분이심을 신뢰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빚을 탕감 받고 살아가는지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심판자의 자리에 판단의 자리에 앉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가르침대로 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고난과 고통을 생각하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느님이나 하실 일이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은 사람임을 깨달아야만 이 용서는 가능합니다.
일만 달란트나 탕감 받은 이 무자비한 종은 용서라는 것을 그 당시의 상황을 운 좋게 비켜나간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주와 노력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 없습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고통과 외로움에 빠지도록 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을 자비하심과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기쁨이며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힘과 지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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