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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6주일 설교문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작성일 : 2019-05-29       클릭 : 25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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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4)  

 

김은경 드보라 신부

 

 

1. 오늘은 세계성공회주일입니다. 동시에 캔터베리의 초대주교였던 어거스틴 축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고백론을 쓴 히포의 어거스틴과 캔터베리 어거스틴은 서로 다른 성인입니다. 캔터베리 어거스틴은 베네딕도수도회 소속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로마 교황의 지시로 영국에 로마가톨릭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영국에 있는 캔터베리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영국교회도 가톨릭교회의 일부분으로 편입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보편이라는 말입니다. 보편교회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는 것은 사도로부터 이어져 온 공교회의 일부분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교회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하나의 큰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부분 교회 사이의 관계성을 고려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거나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 가장 중요한 감각이 이 보편에 대한 감각입니다. 보편이라는 말은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우주나 존재의 전체에 관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편성을 고려하는 사람은 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습니다. 전체에 비추어서 나를 반성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예의나 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편감각을 가진 사람은 독선에 빠지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성을 의식하며 평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교회 아무나학교 월례강좌로 4차산업혁명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4차산업혁명의 대표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네트워크'라고 합니다. 네트워크는 거미줄이나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망을 일컫습니다.

 

네트워크가 중요해질수록 그 연결된 사람들이 평화롭게 상호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평화를 신앙의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 1423절부터 2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주실 평화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에 참여할 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며, 사랑하는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여서 지키려고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한 말을 허투루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 말씀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4절 후반부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3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사랑하고 계심을 알려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3. 만약 하느님이 예수님에게 하느님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지키라고 강압적으로 강요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지키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라고 하신 말씀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강요나 강제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시는 관계였다는 걸 알려줍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에 따르라고 강요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부 하느님의 뜻이 관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겁니다. 만약 하느님을 자신의 말만 관철시키는 하느님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하느님을 파시스트 곧 전체주의자로 만드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억누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사라지게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영원히 보존시키시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권위주의 문화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 벌주시는 하느님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랐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가부장제의 가장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식구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 같은 이미지로 이해합니다.

 

만약 성부께서 성자 안에 계심으로서 성자의 고유성이 사라진다면 성자는 단지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집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도구화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4.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일방적인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서도 일방적으로 강요받지 않은 상태로 하늘이 맡긴 사명을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서 지키려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아셨고, 그 자신도 하느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을 받아들여서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부정하신 걸 말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으며 예수님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만을 주려고 하는 좋은 부모와 같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좋으신 하느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비록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일지라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서가 기록하는 하느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를 이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며 긍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423절 이하의 말씀은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느님과 성령과 함께 서로를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과 긍정에 우리도 참여하길 바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루신 사랑은 성자도 살아있고 성령도 살아있고 성부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게 하는 사랑입니다. 서로를 긍정하고 서로 살리는 생명 살림의 관계입니다. 그 어떤 위격도 우위에 서서 지배하지 않으며 평등하게 평화를 이루며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신 평화와 사랑은 반목하고 깨어진 우리들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성삼위의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나누어지고 깨어진 것을 성삼위께서 완전히 화해시키실 거라는 소망을 갖습니다.

 

성삼위가 이룬 평화는 세상의 지배자들이 힘과 권력으로 강제해서 평정해놓은 위선적인 상태와는 전혀 다른 평화입니다. 상대방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관계는 일방향이 되며 폭력이 됩니다.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서로 다른 존재의 독특함과 고유함을 존중하시는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사랑에 참여할 때 얻을 수 있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역경이 찾아온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6. 바울로 사도는 일생동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켰을 때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바울로는 1차 선교여행의 동료였던 바르나바 그리고 마르코 요한과 갈등하다가 결국 헤어졌습니다. 바울로는 새로운 선교동역자와 선교여행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선교여행 중에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위기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바울로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이 약해지지는 않습니다.

 

바울로가 어떻게 이처럼 고통 가운데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고 끝까지 그 달려갈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바울로는 로마서 835절 말씀에서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 바울로는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고 계신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붙들린 바울로에게 무수히 많은 고난이 찾아왔지만, 바울로에게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빼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바울로는 선교여행 도중에 동료와 갈등이 생겨서 헤어지는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부르심에 응답하여 시작한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울로가 성삼위의 사랑에 참여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때 필립비에 살던 하느님을 공경하던 여인 리디아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리디아가 사랑에 참여하는 삶을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온 가족들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6.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역경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역경이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이루고 계시는 사랑에 참여하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고난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흔들지라도 바울로 사도가 갔던 그 사랑의 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참여하고 계시는 그 사랑,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고, 그 누구를 희생시키지도 않으며, 서로를 온전히 보존해주고 긍정해주며 살리는 그 사랑에 우리 모두가 참여해서 평화를 누리고 생명 살림의 역사를 펼쳐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영화중에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주실 평화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평화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입니다.

 

때는 1930년대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주인공은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이름은 귀도입니다. 귀도에게는 유대인이 아닌 아내 도라와 아들 조수아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독일군이 귀도와 조수아를 유대인 수용소에 잡아갔습니다. 조수아의 엄마인 도라도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귀도와 조수아와 같은 처지를 택해서 여자 수용소에 자발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귀도는 어린 아들 조수아가 겁먹지 않게 하려고 수용소에 끌려온 것이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말해주며 천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덕분에 아들 조수아는 수용소 생활을 게임으로 받아들였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을 힘겹지 않게 지냈습니다.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마침독일군이 철수를 하게 됐는데 귀도는 조수아에게 쓰레기통에 숨어서 주위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을 때까지 잘 숨어 있다가 들키지 않으면 일등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고 덕분에 조수아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조수아는 아버지 귀도의 사랑을 받고 그 자신도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전쟁의 공포를 모르고 지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 귀도가 아들 조수아에게 주었던 평화와 유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을 사랑할 때, 어떤 풍랑이 닥쳐와서 우리를 흔들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로의 말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에 참여할 때 누릴 수 있는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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