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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17주일 설교문_주의 기도(루가 11:1-13)

작성일 : 2019-07-28       클릭 : 31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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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기도(루가 11:1-13)


김은경 드보라 신부

 

1. 지난 주간에 교회학교 선생님과 함께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던 학생의 생일심방을 다녀왔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 학생은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지만, 어떤 감사한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기특하기도 하고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주일 감사성찬례를 봉헌하러 교회에 나오자고 권유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이·학생·청년들이 교회의 품 안에서 성장해 나가기를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1독서 말씀의 배경이 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번영과 풍요를 갈구하며 하느님을 바알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번영과 풍요를 바라고 강력한 권력과 통제력을 갈망하면 필연적으로 그 힘을 갈망하지 않는 이들을 지배하고 압제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는 사회적 불의로 귀결됩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떠난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억압과 착취와 불의한 재판이 넘쳐났습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 죄악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심판이후에 구원하실 거라는 예언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에는 태를 여는 제의가 만연했습니다. 태를 여는 제의는 풍요와 번영의 신 바알을 믿는 이들이 다산을 염원하며, 출산이 가능한 소녀들을 제사 도중에 바알신의 대리자인 남성제사장이나 제단 봉사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된 고멜도 이 제의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고멜은 풍요와 번영을 위해서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하고 번영의 신 바알을 쫓는 원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호세아서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은 히브리어로 에메트라는 말입니다. '책임 있는 관계'를 뜻합니다. '자비'로 해석할 수 있는 히브리어 '헤세드''거짓 없고 다함없는 사랑'을 뜻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진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무지한만큼 불의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댓가인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받아들인 것이 말해주고 있듯이 하느님은 하느님을 배반하여 떠난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 사랑을 배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배워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진실하게 관계의 책임을 지며, 거짓 없고 다함이 없는 자비로운 사랑이었습니다.

 

3.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호세아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 동기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십니다. 우리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십니다.

 

하느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할 분이지, 얼르고 달래서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할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목적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시고 계심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삶의 조건들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숭배를 멈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안해하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진실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4. 우리는 기도할 때, 진실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에 이르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의 기도는 크게 하느님을 경배하는 찬양 기도와 우리들을 위한 간구기도로 나뉩니다.

 

예수님은 먼저 '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 기도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나 자신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는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잘못된 방향을 바꿔서 하느님을 향할 수 있게 바로잡아줍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게 우리의 고유한 본성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시선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볼 수 있고 자신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으로 나를 비추어야만 참자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하느님과 일치를 경험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사라지셨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과 상호공존하시고 상호내주하시는 관계 곧 함께 있음으로서 기쁘고 충만한 관계를 이루셨음을 의미합니다.

 

창문에 햇살이 들이칠 때 창문의 유리가 사라지지 않고 해를 충분히 비추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때 그 빛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창문 유리가 그 빛을 통과해내듯이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나 됨으로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만족해하며 편안히 쉬는 것같은 충만함입니다.

 

5. 예수님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바치고 나서, 나와 이웃을 포함하여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바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때 기도의 수혜자는 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정리하자면, 주의 기도는 하느님 찬양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며 나와 이웃에게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나 자신의 이기심과 자기애나 자기연민을 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를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6. 먼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은 건강한 삶을 지속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먼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했던 때로 데려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고 홍해바다를 건넌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굶주림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중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한 사람들 전체가 굶주림의 문제를 함께 경험했습니다. 이 공통의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먹을거리에 대한 공적인 감각과 연대의식을 배웠습니다. 또한 먹고 살아가는 게 각자도생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제 더이상은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노예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겠노라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굶주릴 때 하느님은 필요한 만큼 나누어 먹을 수 있게 양식을 보내주심로써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두셨습니다. 하느님은 먹고사는 문제를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 전체가 구성원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을 수 있게 공동으로 책임지는 다른 대안 사회를 구성해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보내주신 양식에 대해서 욕심을 내서 더 많이 가져봐야 다음 날이 되면 남은 음식이 모두 썩는 걸 경험하면서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과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게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는 기도는 하느님이 우리의 생명과 삶의 근원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매일 먹어야 할 양식때문에 존엄성을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선언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나와 우리가족의 먹을 양식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교우들, 친구들, 직장 동료들, 우리 사회 구성원, 전 세계 인류의 먹을 양식을 위해서 대표로 삶의 주관자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연대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경쟁하면서 살고 있지만, 삶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은 이 각자도생하는 현실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자녀들 모두가 골고루 필요한 만큼 나누어 먹는 현실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7. 그다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화해 그리고 사람과 하느님의 화해에 대한 기도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화해한다는 건,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불의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심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 모두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진실을 대면하는 기도이며,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음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유심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내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라고 쓰여 있지 않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개인 대 개인의 화해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용서의 주체와 수혜자 모두가 우리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공동체의 화해를 위한 기도입니다.

 

호세아서 전체 구조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듯이 죄에는 그 댓가인 심판이 뒤따릅니다. 심판 없는 구원은 불의를 허용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음란을 행한 고멜을 아내로 받아들였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자식의 이름을 천더기라는 뜻의 로루하마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가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는 이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녀에게는 버린자식이라는 뜻의 로암미'너희는 이미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아니다.'로 지어서 북이스라엘에 경고하셨습니다. 부모라면 가장 좋은 뜻을 담아서 자녀의 이름을 지을 텐데,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 소중한 자식의 이름을 저주의 이름으로 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공의와 정의가 실현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구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심판은 멸절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고 구원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 어디 있고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라는 것에서 멈출 수 없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로 마쳐야 합니다.

 

이 기도는 구원의 날에 우리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우리들의 불의함이 빛 가운데서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자각한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겸손의 기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의 기도를 마무리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는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언약이 실현되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어 갑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주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8.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를 떠올리며,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셀 수 없이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겠지만, 그럼에도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를 통해서 하늘 문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을 때,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우리가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완수할 수 있게 이끌어 가실 겁니다.

 

9.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지향은 분명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해 있습니다. 나 자신의 번영과 풍요가 아니라, 지극한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위한 기도이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가겠노라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나 자신에 대한 숭상을 멈추고 성령과 함께 오직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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