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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1주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데 참여하는 신앙인

작성일 : 2019-08-23       클릭 : 22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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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드보라 신부

 

 

1. 여러분은 동양사상에서 인간을 선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과 악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선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을 성선설이라고 부르고 악한 존재로 바라보는 관점을 성악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어거스틴 전통으로서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보는 관점입니다.

 

인류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며 하느님의 주권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가질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일하실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일뿐입니다.

 

이와 달리 어거스틴과 대척점에 있던 신학적 입장이 펠라기우스 전통입니다. 펠라기우스의 인간 이해는 인간 안에 하느님이 내재해 계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는 인간을 긍정하며 인간이 자기 노력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다가 이단으로 낙인찍혔습니다.

 

2. 이처럼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신론은 각각 하느님을 설명하고 있지만 각각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신학적 전통은 현대신학에 와서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만유에 내재해 계신 것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만유를 구원할 하느님의 은총이 만유에 내재해 계시다고 보는 신론입니다. 이러한 신론을 만유재신론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범재신론이라고도 합니다.

 

만유재신론은 범신론과는 다른 신론입니다. 범신론은 만유가 다 각각 서로 다른 신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범신론에서는 그 각각의 신들의 상관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중심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유재신론은 만유 안에 동일한 하느님이 내재해 계시다고 보고 있는데, 이때 만유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느님께서 만유를 일치시키십니다. 그래서 만유재신론은 신자들 안에 계신 한분 하느님이 신자들을 삼위일체의 관계에 참여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신론입니다.

 

만유재신론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노력을 모두 긍정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하는 일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우리 자신이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러한 신론은 모든 일, 행동, 대화를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관상했던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동경 속에 현존하신다고 보았던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피조세계 안에 계십니다. 특별히 성사인 세례와 성찬례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존재와 삶 그리고 공동체 안에 내재해 계시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3. 신자들은 감사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신자 자신의 존재와 삶의 중심에 내재해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하는 삶을 시작하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는 성찬의 전례에서 성찬기도를 바칠 때 천주교와 달리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반복해서 재현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전례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감사제입니다. 그래서 성공회는 성찬례를 희생제사가 아니라 감사성찬례라고 부릅니다.

 

전례에 참여하면서 신자들은 먼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습니다. 그때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강론시간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합니다.

 

말씀의 전례에 참여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을 떠올린 신자는 감사하는 뜻에서 하느님께 응답하며 봉헌기도를 바칩니다.

 

여기서 유념할 게 있습니다. 신자들은 봉헌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반복하자면, 성공회의 감사성찬례는 예수님을 반복하여 희생시키지 않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역에 나와 우리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일치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하는 삶,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동참하는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4. 자기 존재와 삶을 책임지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삶의 방향성을 찾지 못해서 갈팡질팡할 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오늘 읽은 1독서 말씀에서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자신은 아이라서 맡기신 일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예언자조차 처음에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때는 어른으로 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처음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람이 이미 어른다워서 또는 그 일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워서 맡기셨던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조차 이미 어른이었음에도 사명을 받아들이는 게 두려워서 스스로를 아이라고 핑계댈 만큼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한 예언자의 모습이 친근하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하느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마저 생길 정도입니다.

 

처음 하느님께 부르심 받았을 때 어리석은 핑계를 대며 회피했던 예레미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됐으면서도 어른으로 살아가기를 꺼리며 누군가의 뒤에 숨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모습 말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이처럼 별 볼일 없고 부족했지만, 하느님은 그에게 늘 옆에서 위험할 때면 건져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시며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직 어른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한 우리들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해 나가라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공회 신자들이 바치는 감사제사는 "인간인 나는 전적으로 타락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십시오." 라는 입장에 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제가 하느님 없이는 아이같이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지만, 늘 옆에 계시며 모든 위험에서 건져주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우리 자신도 예수님이 앞서 가셨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노라고 응답하는 일입니다.

 

감사성찬례에 참여한 신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를 세상에 파송합니다. 신자는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세상에 나가서 자기희생의 삶을 지속해가겠노라고 응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소멸시키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며 사랑을 완성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역사입니다.

 

5.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삶은 나 자신을 소멸시키는 허무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중심에 내재해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때 하느님은 우리 자신을 참나로 다시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기희생은 궁극적으로 부활을 행해 있습니다. 허무를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공회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우리 존재와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위의 의미는 내 존재를 부정하고 소멸시켜서, 하느님만이 남아 계시도록 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분도 아니시고, 허무한 분도 아니십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모든 믿는 자녀들의 고유성과 다양성이 성부성자성령의 사귐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느님을 홀로 존재하시려고 피조물들을 희생시키고 도구화시키는 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성서와 교회 전통과 이성을 기준으로 삼아서 하느님에 대한 관점을 다시금 점검해봐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참여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허무하게 만드는 해석들에 대해서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개인적인 주장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귀찮게 여기며 방관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 대신에 자기를 숭상하게 하며 현실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에 눈감게 하는 가르침을 방치하는 건 교회를 그 근본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일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유아독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고도 같은 본성으로 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계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관계적인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믿는 모든 존재와 그 삶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관계적인 분이십니다.

 

6. 오늘 읽은 루가복음 1310-17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하고 계시는 모습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던 한 여인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때는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인들과 회당장을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회당은 본래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며 그 말씀으로 생명을 살리시고 더 풍성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지속 가능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신 쉼의 날이었습니다. 안식일과 회당 모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날 생명이 움터 나와야 할 곳에서 예수님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며 오랜 세월동안 치료의 하느님을 고대해 온 한 여성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보셨을 때, 그녀와 함께 고통 받고 계시는 하느님을 보셨을 겁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여인과 함께 고통 받고 계시는 하느님께 손을 내밀어서 그 여인을 부르시고 "너는 고통에서 벗어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서 병마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자각하며 깨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7. 안식일 법은 품삯을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안전과 존엄성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만든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마련되지 않은 사회에서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그 일하지 않은 날만큼 일꾼과 그 가족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던 상황에서 안식일 규정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 족쇄가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는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유다사회의 지도자였던 회당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마음도 사람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으로 돌봐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마음에서 멀어져 있던 그 때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회당 한 가운데에 찾아오신 겁니다.

 

회당은 본래 하느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치유 기적을 행하신 일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드러내시는 일이었습니다. 회당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키고 안식일의 본질을 바로 잡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일산교회는 부활의 날인 이 주일에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지 묻고 계십니다.

 

8. 예수님과 치유 받은 여인의 입장에서는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회당장은 그 여인을 병마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회복시키신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습니다. 가장 깨어있어야 할 회당장이 하느님께서 임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에 기빠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으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고 안식일에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회당장은 안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지키지 못하는지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단단히 굳어져서 자신이 돌보고 있던 회당 공동체 속에서 누가 고통 받고 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여성의 중심에서 그 여성과 함께 고통 받고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눈앞에 두고도 그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피조세계는 그 존재와 삶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사랑할 힘을 공급받습니다. 하지만 회당장은 하느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겁니다. 사제인 저를 비롯한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자신이 이 회당장과 같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기 보신과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평신도라고 해서 안심하실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신자들을 세상을 대표하는 사제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우리 존재와 삶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지 돌이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9.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고난 받는 이를 고쳐주시면, 미움 받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미움 받고 손해 보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서 고난당하는 여인을 고쳐서 회복시키는 일이 예수님에게는 더 중요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마음과 뜻만을 붙드신 예수님은 위선과 불의와 시기를 뚫고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이 일로 회당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은 예수님에게 죄의 굴레를 씌워서 예수님을 핍박받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비우는 삶은 현실 속에서 손해 보는 길을 택하는 모습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손해 보기 싫어하고 지는 걸 두려워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척만 할 뿐이지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겁니다.

 

손해 보라고 해서 불의를 당했을 때 숨죽이고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불의를 당했을 때 침묵하면 오히려 손해 보지 않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빛 가운데로 드러낼 때 손해를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서 손해 보는 길, 십자가를 지는 길을 예수님처럼 용기 있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하늘만 쳐다보며 손 놓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존재와 삶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서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해서, 나 자신을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시키며, 내 삶의 현장에 하느님의 주권이 임하시도록 동참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 삶에 우리 일산교회 전 교우님들이 서로 격려하고 기도해주면서, 바울로 사도처럼 달려갈 길을 다 갈 때까지, 수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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