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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십자가 위의 왕이신 그리스도"

작성일 : 2019-11-30       클릭 : 189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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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왕이신 그리스도

 

김은경 드보라 사제 

 

1. 오늘은 2019년 다해의 마지막째 주일인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입니다. 이번 주만 지나면 교회력으로 다시 가해를 살게 됩니다. 교회력은 가, 나, 다해 3년을 주기로 합니다. 가해에는 마태오복음, 나해에는 요한복음, 다해에는 루가복음을 읽으며 예수님의 일생에 우리 자신의 존재와 삶을 일치시키는 생활을 반복해 나갑니다. 

 

가, 나, 다해 공통적으로 마지막째 주일은 왕이신 그리스도주일로 지키는데 이때 교회는 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 당하시는 장면을 읽습니다. 교회는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시간으로 보냅니다.

 

주일 이름은 왕이신 그리스도주일인데, 그 왕이신 예수님은 치욕스럽게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습니다. 왕이라고 하면 모두가 그 발 앞에 굴복하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칭송을 떠올리실텐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왕으로 고백하는 분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가치나 기준으로 보면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일입니다.

 

2. 그런데 가만히 오늘 읽은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보면, 조롱받고 모욕 받고 계신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결핍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3장 34절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한 사람에게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말로하기 어려울 만큼 모욕적인 수모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낙원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원한을 갖거나 빼앗긴 자처럼 되지 않으시고, 충만하셨습니다.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보라지!”라고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유다 지도자들의 말에 흔들리거나 그 말을 예수님 마음에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예수님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이 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러한 충만함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소망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예수님을 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믿으셨기 때문에 결핍되지 않고 충만하셨습니다.

 

3. 골로사이서 말씀 1장 11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으로부터 오는 온갖 힘을 받아 강하여져서 모든 일을 참고 견디며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골로사이서 1장 15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만물의 으뜸이시며, 하느님의 완전한 본질을 지니시고, 하느님을 계시한 분이며, 실현시키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내세워서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켜주셨는데,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다고 골로사이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하느님과 나자신이 화해하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 수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나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겠다는 응답이요, 다짐이었다는 걸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조종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등 폭력으로 지배하는 세상의 통치방식을 정당화해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세상이 죄 없는 예수님을 거짓말로 모함했다는 걸 폭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폭력이 세상의 지배방식이었음을 드러내고 무력화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역사에서 사라졌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폭력으로 지배해왔던 세상의 통치방식을 폭로했을 뿐, 그 폭력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한 허무한 일이 됐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온 세상을 구원한 사건으로 기억되지 못했을 겁니다. 단지 어떤 죄없는 한 사람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죽은 이야기에 그쳤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생명을 주시되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시며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그 충만하고 다함없는 사랑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장면은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냈습니다.

 

4. 교회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타락한 인간이 가릴 수 있갰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신학자 어거스틴과 도나투스 논쟁이 그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어떤 주교가 관할하던 교구에 이교도가 침입해서 그 교구의 주교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결국 주교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배교했습니다. 그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이교도의 세력이 약해지고 결국 그 이교도 세력이 그 주교의 관할 권에서 물러간 후에, 그 주교는 교회 앞에 죄를 자복하고 사면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배교했던 전력이 있는 주교가 성사를 집행할 때 성사의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당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과 도나투스가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악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훼방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도나투스는 배교했던 주교를 통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훼손돼서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교회는 최종적으로 어거스틴의 입장을 교회의 정통 교리로 받아들였고, 도나투스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교회 앞에서 죄책을 고백했고 그 교회가 죄책 고백한 성직자를 용서했다면, 그런 성직자의 성사집행이 하느님의 은총을 훼손시키거나 그 은총의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게 어거스틴의 입장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의 행실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으며, 조건이 없고, 은총에 대한 주권이 오롯이 하느님께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은 제한이 없고 충만하다는 교회의 신앙을 확립했습니다. 

 

5. 우리가 함께 읽은 1독서 예레미야 23장 1절로 6절까지의 말씀은 어거스틴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버리는 목자들, 양떼를 돌보아야 할 목자가 도리어 양떼를 흩어벌리고 헤매게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다시 그 흩어져서 헤매고 있는 잃어버린 양떼 중 살아 남은 양떼를 본래의 목장으로 다시 모아들여 크게 불어나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리석고 악한 목자가 하느님의 은총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릴 수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6절 말씀처럼 하느님은 되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6. 저는 요즘에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죄악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릴 수 없고, 하느님의 은총을 털끝 하나라도 훼손할 수 없다는 걸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여서 우리의 죄악을 끌어안고도 회복시킬 만큼 넘치도록 충만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을 때 충만함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그 누군가와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고 마음을 주고 받으면 우리는 그때 충만함을 느낍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믿을 때 충만해 합니다.

 

세상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조롱하고 모욕했을 때, 예수님이 어떠한 결핍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시고,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예수님 자신을 맡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셨던 제자들은 배신하여 떠나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하느냐며 조롱하고 예수님의 옷을 찢어서 나누어가지면서 모욕했지만, 그 조롱하고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참혹한 세상의 폭력과 그 폭력의 희생자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희생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바라보는 겁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고 충만한 그 사랑, 죽음으로도 끊을 수 없고, 어떠한 조롱이나 모욕이 우리 자신을 비웃을 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은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임을 훼손할 수 없다는 걸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어서, 하느님의 크신 사랑 곧 충만하고 다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을 이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례를 바치는 일이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며 하느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의 토대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7. 어린 시절에 쉘 실버스타인이라는 작가가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를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잠깐 줄거리를 얘기해드립니다. 

 

옛날에 나무 한 그루와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 나무를 좋아했고, 매일같이 나무에게로 와서 놀았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타고, 배가 고파지면 나무 열매인 사과도 따먹고, 피곤해지면 나무 그늘에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를 무척 사랑했고, 나무는 소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소년이 나이가 들자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나무를 찾아와서 자신에게 돈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무는 사과를 따다가 팔면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사과를 따가서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년이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집을 마련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들을 베어다가 집을 지으라고 했고 소년은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갔습니다. 그 후 소년은 오랜 세월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다시 나무를 찾아왔고 이번에는 배를 마련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도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을 베어가라고 했고 소년은 멀리 떠났습니다. 이제 밑동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무는 소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또다시 오랜 세월이 흘러 소년이 되돌아왔습니다. 나무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늙은 소년 역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이제 앉아 쉴 곳이 필요했고 나무는 늙은 나무 밑동을 내어주며 소년이 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지만, 결핍되지 않고 늘 충만했고 만족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기대는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계속 달라고만 해서 결국 나무 밑동만 남긴 소년이 괘씸하고 나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사랑이 얼마나 충만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행복해 하는 나무가 예수님을 꼭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나서기로 한 길은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충만한 결핍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8. 우리는 거래와 이해타산을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방식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거래와 이해타산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어주는 사랑,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충만하며 다함이 없는 사랑의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믿는 하느님 나라는 다 내어주고도 충만하고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만 이룰 수 있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런 차원의 삶, 이처럼 세상의 통치를 대체할 수 있는 다스림을 이 세상 속에서 이루기 위해서 참여하고 헌신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성찬의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고 느끼며 받아들이는 경험을 반복해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며 그 자체로 충만하셨던 예수님을 영성체를 영하면서 받아 모실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도 세상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성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매주 목요일 마다 감사성찬례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함께 애찬을 나눕니다. 여러 분들이 봉사를 하고 계시는데 특히 우리 교회 원로이신 박마리아 어머니께서 지난 주에는 삼일 동안 감자탕을 위한 준비를 하시고 요리를 하셔서 목요감사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분들과 성직자들을 위해서 봉사해 주셨습니다. 감자탕을 드신 분들 중에는 감자탕 맛집보다 훨씬 더 맛나다며 좋아하셨고, 대접한 마리아 어머니도 덩달아 좋아하셨습니다. 어찌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 함께 애찬을 나눈 이들 모두가 얼굴이 환해지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았던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외에도 우리 교회에는 교회를 위해서 조건 없이 말씀을 가르치고, 찬양으로 하느님께 영광돌리고, 교회 구석구석을 청소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돌보는 등 여러 가지로 봉사하시는 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 준 이를 감싸 안고, 용서하시며 친교에 힘쓰시는 폭이 넓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그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참여하고 헌신하고 계시는 줄 압니다.

 

하느님께서도 여러분이 말씀을 사모하고, 봉사하고 친교를 도모하는 일을 기뻐하신 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존재와 삶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신 그 충만하고 크신 사랑을 바라보시고, 응시하셔서 예수님을 닮는 길, 곧 우리 모두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 넘치게 부어주시고 변함없고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 나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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