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죄(민수기 32장)
기나긴 광야 여정에 지쳐버린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미디안을 쳐서 얻은 땅을 그들이 받을 몫으로 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셨던 주님의 뜻을 망각한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요르단 동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점과 이로 인해 각 지파간의 분열이 발생하여 가나안 정복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두 지파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두 지파는 다른 지파와 함께 가나안 정복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며 강력히 요청했다. 결국 모세는 두 지파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는 말로 승낙한다.
1. 부메랑 같은 죄.
죄는 원시인이 사용하는 부메랑과 같아서 죄를 지은 사람의 손에 되돌아온다. 형제들이 요셉을 스파이라는 혐의로 고소했고, 그를 구멍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똑같은 혐의로 그 형제들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다윗 왕은 간음과 살인을 범했다. 그러자 압살롬은 다윗에게 똑같이 그렇게 보답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십자가 때문에 자기 자신들의 거처와 산림이 파괴될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죄의 결과가 항상 즉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가끔 번갯불과 벼락 사이에는 긴 시간 간격이 있는 것처럼, 악한 일에 대한 형벌은 즉시 실행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하느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6:7-8)라는 말씀은 그 분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2. 야훼 하느님 앞에.
“야훼 앞에서”란 말이 20-22장에서만 무려 6번이나 언급되었다. 모세는 이 말을 반복함으로써 르우벤, 갓 두 지파와 자신 사이의 약속 및 실행 여부가 모두 하느님의 눈앞에 놓여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란 말이 의미하듯 우리는 하느님의 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있는 존재임을 믿는 믿음은 모든 불화와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초석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성도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 하느님께서 그 죄를 낱낱이 찾아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늘 주님 앞에 서 있음을 명심하고 죄를 멀리해야 한다.
3. 예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가 밝혀지기를 원하라. 예수님의 피와 공로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분을 나의 죄 앞에 모셔야 한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죄의 결과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온갖 추한 죄를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서자. 비록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리하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