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를 두려워하라. (신명기 5장)
하느님께서 사람을 교육하는 방식에도 두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이요,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1. 하느님 교육의 양 날개 - 자비와 두려움
신명기는 교육의 책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율법을 받을 때에 20세 미만이던 신세대를 향해서 모세가 십계명, 즉 율법의 핵심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책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도 십계명이 나와 있지만, 신명기 5장에도 십계명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신명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며 이스라엘을 축복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항상 이런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 준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렇다면 그들뿐 아니라 후손들도 길이 잘 될 것이다”(29절) 하느님의 본심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길만 따라 가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고 잘 될 것이며, 너희가 차지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3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과 장수와 물질과 자손의 축복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고자 작정하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모성애적인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런데 신명기는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엄위하시고, 두려워해야 할 참된 대상이시며,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조금 더 강도 높게 강조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부성애적인 위엄입니다.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은 “하느님의 성품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적절한 균형을 찾으며 묵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모성애적인 사랑만 너무 강조하게 되면 하느님께 무리할 정도로 허물없이 구는 무례한 신앙이 됩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부성애적인 위엄만 강조하면서 하느님은 멀리 계신 하느님이요, 바라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과 하느님 사이에 지나친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생각할 때는 모성애적인 사랑과 부성애적인 위엄 사이에 균형을 이루며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율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성애적인 사랑과 부성애적인 위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게 되면 온갖 축복들이 다 주어지지만,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온갖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며, 축복은 맛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 두려움으로 임한 율법
모세는 율법이 임했을 때의 현장을 한 마디로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1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처음 받았을 때의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틀 동안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명령한 후에 제 삼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제 삼일 아침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이끌고 시나이산 기슭에 섰을 때, 산 꼭대기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치며, 빽빽한 구름이 일어나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게 울리자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모두 떨었습니다. 그리고 연기가 자욱하며 하느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고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느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삶의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음성으로 십계명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십계명이 두 돌비석에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십계명은 두 돌비석으로부터 먼저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전해졌습니다. 이 음성이 울릴 때의 분위기는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직접 말씀하신 후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내용을 두 돌판에 기록하여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중보자를 원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한 번은 요행히 살아날 수 있었지만, 두 번 다시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나가서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하겠습니다”(2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모세를 중보자로 요구한 것은 잘한 것이며, 그들이 항상 그런 마음을 품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토록 자손대대로 복을 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워할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해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더 큰 두려움으로 받아야 할 복음
구약시대에 시나이산에서 만난 하느님은 두려운 하느님이지만, 신약시대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므로 신약시대에는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품어봄직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하게 하느님은 두려워 할 하느님입니다. 오히려 신약의 하느님은 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하느님이십니다.
신약시대에도 사람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났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마르 1:11) 또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바로 그 때에 구름이 일며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마르 9:7)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만이 중보자를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하느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고, 둘째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4. 율법과 복음의 궁극적 권면
율법과 복음이 두려움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은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당근의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끊어진다’는 채찍의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도 ‘믿으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부활하게 된다’는 당근의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지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다’라는 채찍의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신명기 전체를 통해서 새로운 세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느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것이니 들어가게 되겠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붙어살아라!” 이것이 핵심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하느님께 붙어서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눈 밖에 나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질 일은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죄 짓지 말라는 내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느님께 붙어사는 원리를 말해줍니다. 신명기 4:3-4절을 보면 “야훼께서 바알브올에서 하신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브올의 바알신을 따라 간 사람을 너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모두 너희 가운데서 쓸어 버리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알브올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모압의 신 바알브올을 섬겼던 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일로 진노하셔서 무려 이만사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바알브올의 일에도 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러나 너희의 하느님 야훼께 신실하였던 너희는 오늘 이렇게 모두 살아 있다”(4절)
여러분, 하느님께 붙어서 떨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이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떨어지면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아닙니다. 가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가지는 그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때가 차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나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살 것과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붙어서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가난하고 약한 것은 인생에 약간의 불편을 주긴 하지만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가난하거나 약하다고 해서 반드시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는 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셔서 우리에게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한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신다면 이것만큼 참된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