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viamedia.or.kr/2008/03/17/189
여기서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언급했고, 이 논의를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에서 전개한 적있습니다. 아래 내용이 그것입니다.
아직도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 혹은 편견이 팽만하여 이를 마음대로 적용하는 것을 듣고는,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그 내용을 다시 옮겨 놓습니다. 성직자들이 먼저 바르게 알아야 신자들도 바르게 압니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http://liturgy.skhcafe.org/topic.php?id=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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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말씀과 성사"라는 글에서 짧게 언급된 "고교회와 저교회"의 구분 기준에 대해서 zinkoo님께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원래 글이 이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스치듯 언급한 것이었으며, 언젠가 다시 한번 찬찬히 짚어 보아야겠다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독립된 글로 떼어 많은 분들과 의견을 나눴으면 합니다.
사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언젠가 서울교구 성직자 포럼 게시판과, 작년 전례 포럼과 세미나에서 몇몇 신부님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만, 우리 인식 속에 퍼져 있는 생각을 되돌아보기에는 그리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선 이것은 여전히 고민 중이고 연구(까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하는 중에 나온 제 생각의 정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말씀과 성사"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썼습니다.
이 참에, "말씀"과 "성사"에 대한 분리된 강조점을 각각 "저교회"와 "고교회"의 틀에 대입시키려는 흐름을 잠깐 짚었으면 합니다. 이런 대입법이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그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개신교의 여러 교회들이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 zinkoo님께서 이런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 중에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저교회와 고교회의 구분인가요? 실지로, 메소디스트 들은 매주 성찬례를 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일반적으로 저교회라고 분리되는 것은 왜 그런가요? 우리 주위에서 저교회와 고교회의 정의가 애매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서 저는 그 구분 자체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신부님의 생각을 더 듣고 싶습니다.이에 대해서, 1) 이런 새로운 이해를 소개한 이유, 2) 용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의 복잡성, 3) 현대 전례 운동이 시사하는 것, 4) 존 웨슬리의 경우, 5) 새로운 대화를 위한 논의 방향 등의 내용으로 생각을 나눴으면 합니다. (이미 zinkoo님은 이런 논의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다른 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제 자신의 정리를 위해서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
1.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해서는 성공회 전통을 조금이나마 안다는 분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옳든 그르든, 심오한 것이든 표피적인 것이든, 학적인 개념 논의이든 상투적인 구분이든 간에, 나름대로 진실을 조금씩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최근에 "고교회와 저교회"라는 용어를 한국 교회 안에서 어떤 분파적인 운동의 방향과 가치로 잡는 인상이 엿보여서 여러 기회를 통해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보았으면 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성공회는 '고교회 일색이니 저교회가 필요하다'든가, 영국에 갔더니 '저교회가 더 많고 성장하더라. 성공회는 고교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속은 것 같다'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이런 의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의식의 흐름, 혹은 한국 성공회 내부의 어떤 기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고 싶었고, 이런 인식의 태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보았습니다.
2. 역사적 사실의 복잡성과 용어의 적용
사실 "고교회"나 "저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적절하거나 옳은 표현은 아닙니다. 일반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교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즉 "고교회주의자"(high churchmen)와 "저교회주의자들"(low churchmen)으로 표시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과 역사적 사실, 특히 영국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종교의 관계 등에서 이를 정확하게 헤아려 단적으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또 이 때문에 용어 상의 혼란뿐만 아니라 내용 상의 혼란도 가중됩니다. 이건 우리 탓이 아닙니다. 영국 애들이나 미국 애들도 헤깔려 하고 자기네들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역사를 좀 헤아려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이해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를 "장엄 미사"(high mass)와 "단조로운 미사"(Low Mass)라는 전례 거행 형태 상의 차이를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입시키는 것입니다. 용어 상에 "high"와 "low"가 각각 들어 앉아서 그럴듯 하게 보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우선 high mass 와 low mass 의 구분은 중세 때부터 있었고, 이 모두 성찬례의 거행 행태에 대한 표현법이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고교회"와 "저교회"의 구분이 아닙니다.
1) 그럼 '고교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고교회의자들'(High Churchmen)이란 17세기 영국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등장한 일단의 성직자와 신자들 무리입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영국 교회가 가톨릭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회와 국가의 일치, 국왕의 권위, 주교의 권위, 그리고 성사들의 권위가 높은 (high) 신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강조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국 정치 상에서는 국가와 교회의 일치, 왕권신수설의 주장과 연결되었고, 교회 안에서는 주교직과 성사에 대한 강조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점들은 역사적으로 영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매우 한정됩니다. 특히 정치적인 강조점들은 영국 이외의 다른 성공회와도 연결지을 만한 점이 없습니다. 즉 여기에는 단절과 연속이 있습니다. 결국 세계성공회에 유의미하게 남는 문제는 주교직의 권위와 성사의 권위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지점을 강조하면서 나온 것이 이른바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의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그전의 '고교회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일컫는 좀더 바른 용어는 '성공회-가톨릭주의자들'(Anglo-Catholics)이라 하겠습니다.
2) 한편 '저교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역사적으로 보자면, '저교회주의자들'은 국교인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 내의 사람들과, 영국 교회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들(비국교도, non-conformists)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그들이 어느 쪽에 소속되어 있든 그 특징들은 주교직과 사제직, 성사의 위치를 낮게(low) 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영국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는 교단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국민 교회(national church)의 성격이 강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한 교회 안에 전혀 다른 분파들 - 단순한 의견 상의 분파가 아니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단적 분열에 가까운 - 이 공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이른바 성공회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과 연결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주의자들이 늘 '저교회주의자들'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고, 이 안에서도 광범위한 일치점이 존재했던 것도, 그리고 어떤 일관성을 갖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의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는 전형적인 "고교회 전통" 안에서 시작되었고, 영국의 복음주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혀 다른 색깔들로 많은 변신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3) 논란의 지점들
강조점이 아니라, 분기점이 되는 공통의 주제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교직의 문제, 사제직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사에 대한 이해라 하겠습니다. 이 점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신학적인 주장들과 사목적인 적용들이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여기서는 성사에 대해서 좀더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우리 식'의 고교회와 저교회에 대한 이해의 틀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3. 현대 전례 운동이 시사하는 것들
저는 개인적으로 16세기의 종교개혁이 1차 종교개혁이었다면, 20세기의 교회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과 전례 (쇄신) 운동(Liturgical Movement)를 2차 종교개혁이라 봅니다. 그 의도와는 관계없이 16세기의 것이 교회의 분열과, 성사에 대한 이해의 분열을 낳았다면, 20세기의 것은 교회의 공통 유산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근거한 새로운 대화와 모색을 추구했습니다.
교회 전통의 풍요로운 역사에 대한 고민은 지금까지의 서방 교회 중심적인 틀을 벗어나서, 동방 교회의 유산에 대한 관심과 배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위계 질서와 직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삶의 형태요 틀인 성사(sacrament)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이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그랬던 것처럼 좀더 넓고 깊은 차원에서 성서와 초대교회의 삶과 그 경험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성사와 관련하여 이 운동이 얻은 깊은 통찰은 "세례와 성찬례'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를 재론할 필요는 없겠고, 이러한 성사의 기본에 기초하여, 기존의 다른 성사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새로운 배움들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개신교에서는 특별히 고백성사와 관련한 것이고, 루터교 전통이 오랫동안 씨름해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운동의 가시적인 효과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세례(혹은 이를 포함한 입교의 전과정 Christian Initiation)에 대한 강조와 예식의 개혁, 그리고 성찬례를 주일(부활일의 연속으로서)마다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이 운동의 도전과 성과를 깊이 인식하는 교단들은 이 점을 자신들의 삶 안에 실현해 내려고 분투하고 있습니다.
이 전례 운동은 기존의, 서방 교회 중심적 사고와, 영국 교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틀 안에서 논의되는 모든 견해와 용어들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자극합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고교회와 저교회"에 이해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렇게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우리 식으로 "쉽게" 말하자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도 헤깔릴 것이 분명한 고교회와 저교회의 역사적인 사정들의 한 대목만을 끄집어 내어서 어떤 대결이나 비판을 위한 지렛대로 삼을 필요가 없고, 그것이 우리 교회가 하느님 선교의 삶을 살아나가는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여전히 '성공회의 모국인 영국에,' 혹은 어떤 '원전'에 기대려는 식민지적 사고 방식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고교회와 저교회에 관련한 '우리 식'의 새로운 이해를 소개하는 것은, 영국 교회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이전과 이후, 그리고 특별히 전례 운동이 가져온 중요한 성과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우리 선교 현실에서 새롭게 보자는 것이지요.
성사에 대한 강조점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실천과 관련하여, "고교회"를 성찬례를 매주 하는 "흐름"이고, "저교회"를 그렇지 않은 "흐름"이라고 보면 좀더 분명하면서 포괄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역으로 이런 식으로 보면 지난 역사의 논쟁에 대해서 새롭게 볼 수 있는 어떤 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제안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규정에는 분명히 역사의 연속과 단절이 있습니다. 전통적 고교회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찬례를 매주하는 흐름"과, 전통적인 저교회주의자들이 "성찬례"를 그리 강조하지 않고 하지 않았던 점들이 그 연속이라면, 단절은 성찬례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폭이 이전과는 달리 매우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4. 존 웨슬리의 경우
언급하신 존 웨슬리와 이른바 메소디스트(Methodist)의 경우는 대표적인 "저교회" 운동의 사례로 인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훨씬 복잡합니다. 즉 역사적 사실과 그 이후에 발전된 행태들, 그리고 그 경험들과 관련된 해석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만 지적합니다.
존 웨슬리 집안은 "고교회주의" 분위기가 매우 강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전통적인 고교회주의자들과는 다른 "국왕 충성 거부자들"(Non-Jurors) 전통에 있는 고교회주의자였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웨슬리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기도 하고, 또 난점이기도 합니다. 그가 고교회적 전통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강조했던 당시의 고교회주의자들인 "국왕 충성 거부자들"의 신학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 심취했던 것, 그리고 특별히 고대 교회의 삶과 행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고교회주의는 영국 자체의 정치적 격변때문에 다양한 의미와 결을 갖고 있었습니다.
존 웨슬리는 칼빈주의, 특별히 예정설에 적대적이었다는 측면에서 전형적인 영국의 저교회주의자들인 청교도들(퓨리턴)과는 달랐으며, 그의 신성 그룹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기도서를 실제로 사용하고, 이를 신앙적 영성적 훈련의 틀로 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별명이 메소디스트가 되었던 것이지요. 메소디스트라는 별명은 고교회주의자들이 아닌, 오히려 그들의 행태를 조롱했던 국교의 자유주의자들(전례적으로는 저교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미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성공회-가톨릭주의자들의 선교회로 이해되었던 SPG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전례 포럼과 세미나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웨슬리는 대체로, 미국의 감리교도들에 의해서, 그들의 상황과 입맛에 '해석된 웨슬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한국 교계에서는 괴이하게도 '장로교적으로 해석된 한국식 미국 복음주의의 웨슬리'라는 긴 수식어를 통해서야 '한국에서 해석된 또다른 웨슬리'가 드러납니다. 이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웨슬리의 '회심' 경험과 그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 점은 전통적인 "저교회주의자들"의 신학과도 여러모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습니다. 어쨌든이 '해석된 웨슬리'도 여전히 '역사의 웨슬리'의 한 부분이긴 하겠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최근의 웨슬리 연구서들은 이런 점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회심" 강조 - 모라비안들의 영향, 결국 웨슬리는 모라비안과 결별했습니다만 - 의 신학에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핵심적인 사상인 "성화" 강조의 신학으로의 전환이 현재 웨슬리 연구의 통설인 것 같습니다. (저는 웨슬리 전문가는 아니라서 더이상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제 최근의 독서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 웨슬리에게 "저교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곤란한 점이 많다고 봅니다. 오히려 영국 성공회 내의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요한 시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의 전통이 영국 복음주의 안에서 균일하게 이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복음주의자들, 특별히 복음의 삶과 사회 정의에 관심했던 복음주의 전통은 이러저러한 연유에서 탈각되어, 좀더 개인주의화된 신앙적 신학적 조류로 발전되었고, 영국에서는 1920년대를 거치면서 매우 협소한 이해를 가진 전통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이들의 성찬례 이해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1960년 대 이후부터는 미국식 복음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5. 새로운 대화를 위한 논의 방향
결국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인 정황들에 대한 생각과 고찰을 거쳐서, "그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두 문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결론에 이르는 이 긴 설명을 생략하고, 이 두 문장으로 담아내려고 했던 것은 무리였겠고, 그리 친절한 자세도 아닌 것을 압니다. 하지만 아주 짧게, 그것도 본래의 논의에서 약간 벗아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언급한 것은, 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좀 할 수 있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zinkoo님께서 물음을 제기하신 것은, 내심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신학적 논의가 어떤 대결을 벗어나서 좀더 창조적이 되고, 역사적인 몇몇 계기에만 얽매여서 아전인수하는 해석, 그리고 이 허약한 논의에 기대어 우리의 주장을 펴보려는 것에 대해서 한번은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무리한 줄은 알면서도 고민 끝에 그런 구절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고 문제를 제기해주신 zinkoo님 덕분에 제 변명을 보탤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에 덧붙는 논의와 의견을 통해서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좀더 깊어지고, 제 자신의 생각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합니다.
많은 분들의 논평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2008년 3월 25일)
주낙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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