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핵심단어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시24;1)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골1;16)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무지와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인해 자신에게 속아 넘어졌습니다.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창3;6)에 속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올가미, 곧 간악한 속셈입니다. 우리는 결코 타자에 속은 것은 아니라, 자신에게 속아 삽니다. 바울은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롬7;19-21)우리는 태생부터 이중적, 양면적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영과 육이 공존합니다. 육체적인 욕망과 영적인 선한 열정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욕구 안에는 영적 욕구, 갈망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육체적 굶주림의 궁극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굶주림이고, 목마름은 일치, 사랑에 대한 갈망이고, 헐벗음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곧 전인격적 성숙과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치에 대한 몰이해내지는 외면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욕구에 집착합니다. 육체적 생존욕구 너머에 영적 생존욕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트집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 합니다. 선한 열정을 대변하는 예수를 억압하고 죽이려는 속셈의 궁극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 있는 선한 열정을 억압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으면 동시에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입니다. 분명 예수께서는 육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고, 땅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세상적 의무를 외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실 때에,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셨고, 성전세(17장)도 바쳤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깨달음에 이르도록 일깨우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려고 빚어 만든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의 본질, 정체성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