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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작성일 : 2009-05-04       클릭 : 244     추천 : 0

작성자 산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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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예수처럼 살지 못하면 예수는 이름뿐인 나의 주(Lord)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삶을 닮지 않았다. 교회는 종종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신학 강단에서 배우게 되는 기독론은 종종 예수를 따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신학적 알리바이로 둔갑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라는 자신의 중심적 메시지로부터 ‘이혼’ 당한 슬픈 예수를 본다. 물론 하나님나라가 떨어져 나간 예수의 빈자리는 언제나 정치적 권력, 문화적 우월감, 종교적 완고함, 기존 질서에의 순응, 그리고 도피적 구원관이 메운다. 이제 다시금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믿고 살았던 것을 믿을 때가 되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과거 다윗 왕조와 같이 군사적 힘과 상업적 발전에 의해 지탱되는 정치적 메시아 왕국이 아니었다. 이 땅에 사는 무지랭이 잡초와 같은 인생들에게 주어진 현재의 나라였다. 그리고 그 잡초와 같은 인생들은 다름 아닌, 유대법에 의해 ‘죄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런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직접 몸으로 살았다.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위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의 질서에 대한 커다란 모독이자 노골적 반란행위였다.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곧 그를 인정하며 그와 함께 삶, 즉 생명을 나눈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이는 당시 유대종교의 법과 질서에 대한 전면적 도전행위였다.

당시 유대 사회는 철저한 이분법적 사회였다. ‘깨끗한 자 vs 부정한 자,’ ‘거룩한 자 vs 속된 자’, ‘의인 vs 악인’의 구별에 근거한 사회였다. 물론 이러한 이분법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의 위기 속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벌인 민족의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해나가려는 민족갱신운동의 산물이었다. 말하자면 ‘딱딱한 율법주의의 껍질’로 연약한 속살과도 같은 민족의 생명을 이어나가려는 운동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적 정결법이 수많은 ‘죄인들’을 조직적으로 양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죄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죄인과 다르다. 당시의 ‘죄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지킬 수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법이었다. 곡간에 먹을 것을 쌓아둔 사람이야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일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도 안식일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바로 겨자 풀과 같은 인생, 즉 잡초와 같은 인생들이었다.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하나님나라

구체적으로 당시에 ‘죄인들’이라 불렸던 이들은 가난한 자, 눈먼 자, 절름발이, 앉은뱅이, 문둥이, 창녀, 세리, 귀신들린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온갖 사회적·종교적 비난을 무릅쓰고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과 열린 식탁 친교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를 ‘먹보’요,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명쾌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

여기서 ‘죄인’은 정확히 ‘소위 너희들이 말하는 죄인’이다. 예수는 인간이 세운 관습법의 기준에 의해 죄인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는 똑같이 임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하나님나라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프냐? 네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더 아파라!’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프냐?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 아프지 마라!’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 속에 ‘겨자 풀’처럼 번지는 것이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탐욕과 배척과 이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으로 사정없이 밀고 들어가 나눔과 섬김·치유·사랑의 새 질서로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나라다.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살다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를 잡아 죽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다. 하지만 ‘닫힌’ 경건주의자들이었다. 예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진리를 위해 남을 죽일 수도 있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했다. 세상이 그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하나님나라는 일단 시작되면 세상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예수 알고 믿을 수 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듣고 잊어버립니다. 보면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실천해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나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3:17)이라는, 신앙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말 속에는 여전히 믿음(‘예수 믿기’)과 실천(‘예수 살기’)이 마치 각각인 것처럼 전제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예수 살기’(실천)가 ‘예수 믿기’(믿음)의 인식론적 근거(epistemological basis)가 된다는 것을, 즉 ‘예수 살기’ 없이는 ‘예수 믿기’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예수처럼 살아야 예수를 알고 믿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예수에 대한 믿음’(faith in Jesus)은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으로 이어지고 성숙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기’를 통해 ‘예수 살기’로 나아갈 수도 있고, ‘예수 살기’를 통해 ‘예수 믿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수처럼 살지 못하면 예수는 이름뿐인 나의 주(Lord)이거나 자신의 이권을 합리화하는 제의적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를 나의 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devotion)이 나오지 못한다.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 그 둘은 원래 하나이며 변증법적 관계 안에 있다. ‘신앙의 그리스도’(예수 믿기)와 ‘역사의 예수’(예수 살기)가 택일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북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되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때 한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물었다. “What is your name?” 그러나 그가 대답했다. “My name is Christian!”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그 병사에게는 ‘예수 믿기’와 ‘예수 살기’가 별개가 아니었다.

교회란 이러한 ‘크리스천 정신’(Christian spirit)에 기초한 신앙인을 훈련해내어 탐욕과 배척과 이권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나눔과 섬김과 치유와 사랑의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래서 이 나라와 세계와 역사의 새 미래를 열어 가는, 신나고 영광스런 소명의 자리가 아닐까.

[펌] 장윤재 / 이화여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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