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6 주일 마태13:24-30, 36-43 로마8:12-25
2011년 7월 17일(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삽니다. 이 말은 “본능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만을 추구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권력싸움 하고, 편안히 살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인도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다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은행에 빚을 지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깝게는 부모님께 빚지고, 가족들에게 빚지고, 국가에 빚지고, 무엇보다도 주님께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면 안 됩니다.
빚진 사람이란 말은 “지불할 의무가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에 빚을 진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는 죄로 인해서 더럽혀졌습니다. 육체의 일에만 치우치게 하여서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느님과 원수가 되어서 결국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육체는 우리를 영원한 저주아래 살게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빚진 자입니까? 먼저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에게” 우리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보면 느낄 것입니다. 나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불효자는 아닌가? 사실 우리는 모두가 부모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다음은 국가에 빚진 자입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묻겠지만 나와 가정의 안전을 지켜주었고, 좋은 시설들을 통해서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물론 너무 개발을 해서 유익하지 못한 것도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으로 삶의 편리함을 국가가 제공하고는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빚은 나 위해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왓츠라는 사람은 벌레같이 쓸모없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감동을 “웬 말인가 날 위하여”라는 노래했습니다. 찬송가사 중에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는 가사는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사제가 되어서 빚을 갚고 있는 중입니다. 혹 하느님께 거절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빚을 진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을 육체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주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하였고, 율법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준 것은 근본적으로는 주님이시지만 그것을 나에게 구체적으로 적용시켜주신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에게 빚을 졌다는 말은 성령의 은혜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났고, 성령의 은혜로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죽는 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 번 죽습니다. 첫째는 영혼이 죽습니다. 하느님과 영혼이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자의 시절에는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영혼이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육체가 죽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결별합니다.
끝으로 육체와 영혼이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됩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동시에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영적으로 죽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육체의 악한 행실을 요일2:16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쫓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말은 육체의 힘을 꺾어서 복종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옵니다. 성령만이 육체를 복종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를 죽여야 영혼이 삽니다. 믿습니까?
하느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의 첫 번째 특징이 바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인도한다는 말은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가는 방향을 제시해주고,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옮겨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노예의 상태는 두려움이 특징입니다. 불안, 근심, 긴장, 공포, 걱정, 위험이 늘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노예들이 겪는 공포를 받지 않습니다. 노예는 인정받지 못할 가봐 걱정입니다. 비난받을 가봐 걱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는 공포와 두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 근심, 걱정, 불안, 긴장을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어 하느님의 상속자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과 함께 동행 하며,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친 아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뻔뻔한 것입니다. 탕자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의 몫을 당연히 주어야 할 줄로 알고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는 청년들은 없을 것입니다. 다 큰 자녀가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는 것을 미안해하지요 그래서 알바를 합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애를 씁니다.
반면에 탕자처럼 부모님께 당연히 받는 것처럼 달라는 자녀는 미안해하지도 않습니다. 늦게 와서도 밥을 달라고 합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렇게 곱게 길러서 키웠지만 나중에 보면 불평과 원망만 합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 살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게 되고,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있다고 말합니다. 몇 해 동안 안양교회는 교회건축이라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쉽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 있는 입장도 못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연약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우리 모두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격려를 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교우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그리고 응답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