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혹 자존심이 상해서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는 의외로 매우 단순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정과 가족간의 관계 및 평화보다도 내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할 경우에는 주님보다도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일들이 우리 안에서, 또 삶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외모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외모에 대하여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돈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돈에 대하여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상처는 자존심을 공격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자하고, 온유하고, 사랑이신 주님의 말씀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의 딸을 치유해 달라고 찾아온 이방 여인에게 당시의 유대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냉대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이방 여인을 ‘강아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주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은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것 같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상처가 자존심으로 작용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의 이런 태도에 담담히 고백합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여인에게 주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장하다(크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자기 자존심보다도 주님을 더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 때문에 불순종한다면 내 자존심이 어느새 우상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에 따라서 다르지만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자존심 상하는 것은 못참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사람들에게는 꼭 자존심 상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관계를 파괴하고, 일을 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존심보다 소중한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실상과 증거는 내 자존심보다도 주님이 더 소중함을 고백할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존심! 이것이 주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짓을 안 할 것이며 자존심이 있다면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며 자존심이 있다면 양심을 파는 짓은 안 할 것이며 자존심이 있다면 열심히 일해서 구차하게 살지 않을 것이며 자존심이 있다면 쩨쩨하지 굴지 않을 것이며 자존심이 있다면 자신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것은 '콧대가 높은 것'과는 다릅니다. 교만하고 무례하고 건방지고 도도하고 남을 깔보는 것은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속좁은 마음입니다. 속좁은 마음과 자존심을 혼동하지 마세요. 자존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과 사랑, 가치, 능력 등에 대한 평가입니다. 자존심을 높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칭찬과 격려입니다. 우리 서로는 칭찬과 격려 속에서 자존감이 키워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디슨의 어머니를 봅시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로부터 바보 멍청이라며 퇴학당했습니다. 퇴학맞고 집에 오는 자녀들을 반가이 맞을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에디슨을 힘있게 안으며 "세상 사람이 다 너를 바보라고 조롱해도 하느님은 너를 조롱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너를 조롱하지 않는 것 같이 나도 너를 조롱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못하고 싸워서라도 끝까지 사과를 받아내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 눈치를 살피며 아무 소리도 못하고 사는 사람에 비하면 자신을 지키고 주장하는 것이 무척 당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은 너무 자신이 없고 두렵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으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과잉 방어하고 공격하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신감이란 환경과 상대방에 의해 자신이 평가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날 무시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존엄성이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에 의해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상대방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이 주시는 의와 존귀함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긍심을 가질 때 상대방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속어에는 ‘제 잘난 멋에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자존심에 관한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자존심은 내가 나를 높이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남에게 짓밟히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마음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진정한 자존심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존심은 자기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자기 이익을 지키고, 대인관계에서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심이라기보다 자기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존심은 남의 침해에 반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고유한 생명 그 자체요, 특성이며 빛깔인 것입니다. 참된 의미에서 자존심은 자기가 자기 모습을 지키고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거룩한 정신입니다.
비록 오늘의 네 처지가 어렵더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영원한 것과 바꾸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을 위해 자기의 바른 생각을 꺾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거룩한 자존심인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남을 자기 삶의 표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저 남의 모습을 자기 반성의 거울로 받아드릴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고 남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은 곤궁에 처했을 때 그 무게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열등의식이 있는 사람은 피해의식에 젖어 있어 그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이상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기의 자존심으로 오해합니다. 이런 변질된 자존심 때문에 자기도, 남도 불행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자존심의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합니다. 거룩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구차한 삶을 위해 아부하지도 않고 불의와 재물과 명예와 권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유달리 많이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으로 이집트상인에게 팔려가 종이 됩니다. 종살이를 하는 중 주인 여인에게 유혹을 받지만 거절합니다. 그것으로 미움을 사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집트를 다스리는 총리가 됩니다. 이 사람의 자존심이 거룩한 자존심인 것입니다. 형제들이 팔았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해도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임금에게 아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만 지켰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니 자존심도 지켜진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심은 신앙을 지킬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요한1서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2:9)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각은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해서 능률을 올리는 기초가 됩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요, 선택하신 민족이며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정말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긍지와 거룩한 자존심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는 때로는 나의 자존심이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신앙과 용기를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