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사랑을 ‘주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셔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요3:16).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을 우리들에게 ‘주신’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신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되는’ 사랑입니다. 가장 귀하고 가장 신비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나 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많은 성인들이 ‘되는’ 사랑을 소원하며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큰 인물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을 중퇴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 나라의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성학교를 세웠는데 '죽을지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이 대성학교의 교훈이었읍니다. 안창호 선생은 교회를 세워 전도사 일까지 했습니다.
그는 "우리 백성이 다 손에 성경을 쥐는 날에는 우리나라가 바로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형무소에서 나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우리 백성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물고 찢으면 망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되는’ 사랑으로 나타난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날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깊이 알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사람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사랑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유 그 첫째 이유가 하느님께서 그의 사랑을 인간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셨는가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심으로써 그의 아들을 육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롬5:7-8). 하느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죽게 되었으며 하느님은 이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뜨거운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 중에서 죄 없는 온전한 인간이 나와서 인간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죄인들을 구원하실 길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자기 아들을 이 같은 희생 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히2:14-1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이처럼 자세히 관찰하여 깨달을 때 그분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예수의 신성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그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이 보내신 은혜의 선물이요, 이 마지막날에 친히 그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진리로 오신 분이심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임마누엘이란 이름 속에 하느님이 숨어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매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사9:5).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라고도 불렀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나라를 잃어버리고 슬픔과 억압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메시야 즉 너희를 구원할 구세주의 언약에 대한 말씀하심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실 때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잠깐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이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사셨고 사람들처럼 피난살이도 했습니다. 인간의 배고픔과 아픔,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사시므로 진정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격할 일이며 감사할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으로 사셨고, 사람으로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사랑에 감사 할 뿐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로는 그 사랑을 몸에 지니고 그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되는' 삶을 살고자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나 매여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고린9:19).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알리며,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를 강요했다. 시간이 흐르자 성전은 노인과 청년들로 가득 찼다. 모든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하여 훌륭한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는데 수도사는 설교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촛대를 꽂아 둔 곳으로가 밝게 타고 있는 초가 꽂힌 촛대를 집어들고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수도사는 밝게 타고 있는 촛불로 못박히신 예수님의 팔을 비추어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촛불을 옮겨 역시 못박히신 예수님의 다른 한 팔을 비췄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촛불은 못 박힌 예수님의 두 발을 밝게 비추어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수도사가 일어나서 돌아섰습니다. 그때에도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춰 모인 사람들은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뺨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 기도를 하고서 사라졌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배웁니다.
자기의 기질을 끝까지 고집하며 지키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성탄절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주는’ 사랑과 함께 ‘되는’ 사랑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몸에 조금씩이라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을 조금씩이라도 몸으로 실천할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고 행복으로 다가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정한 사랑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에 조금씩이라도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