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드린 기도를 보면 “죄를 짓든지, 전염병이 돌든지, 천재지변을 당했든지, 외국이 침략해 올 때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네가 세운 성전을 성별하여 영원히 나의 것으로 삼아 장차 내 눈과 내 마음을 영원히 그 곳에 두겠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센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그 백성의 흥망성쇠가 좌우되었습니다. 이것은 새 성전을 건축할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고, 열심히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할 때 하느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전은 “하느님의 집”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의 집”이기도 합니다. 예배와 함께 제자훈련(교육), 섬김과 봉사, 친교와 전도 등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교회 웍샵을 통해 교회목표를 정하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 함께 의논했습니다. 금년 목표는 예배와 제자훈련(교육), 사역(봉사)와 교제(친교), 그리고 전도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익히 해 오던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새롭게 성도의 모습을 찾고 사명과 목적을 지향해야 합니다. 신앙 잡지에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를 이렇게 비교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교실, 주차장 등 공간이 모자라는 문제가 있다.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을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한다. 죽어가는 교회는 늘 똑 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고요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이 많아 일꾼이 부족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일이 없기에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의 사람이 많아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드리는 자로 가득 차 있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가득 차 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으로 운영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인 판단에 의하여 운영된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지내기가 편안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가 활발하고,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석화되어 간다”. 이 기준으로 나 개인과 우리 교회를 진단해 보면 우리의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제 새 성전을 건축하려는 안양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려면 깨어 나야하고, 고쳐져야 하고, 회복되어야 하며, 바른 목적을 지향하여 새롭게 출발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더 강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전을 중심으로 모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의 존재 목적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데 있습니다. 교회 행사나 교인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예배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에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 방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하면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오래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자주 빠진다든지, 예배 시간에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며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우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가 기다려지고, 예배가 좋고, 그래서 모든 예배에 다 참여하게 됩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배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면 여러분은 지금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우는 일 즉 제자훈련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교인은 많으나 성도는 적고, 성도 중에도 제자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를 구별하셨습니다. “무리”는 그냥 모였다 흩어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초대 교회성도들은 모두가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도2:42에 성도들에게 이루어진 일 가운데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제자 되어 변화를 받으면 그것이 곧 우리 교회의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교회 성장을 위하여 일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리들처럼 단지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배우고 참여하는 자가 됩시다. 마지못해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솔선해서 앞서가는 제자, 방관자가 아니라 주도자가 됩시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전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의 목적은 구원받기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임과 동시에 구원하기 위하여 흩어져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불은 타는 것으로 존재하고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건물이 어떠냐 예산이 얼마냐에 있지 않고 성도들이 전도하기 위하여 얼마나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두개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래아 호수요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등 제자들도 대부분이 어부 출신인 것이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해는 아무 생물도 살 수 없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갈릴래아 호수는 헤르몬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을 받아드림과 동시에 요르단강으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사해는 요르단강에서 들어오기만 하지 흘러 나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증발되면서 짠물이 되어서 생물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바다 즉 사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고 전하지 않으면 사해와 같이 됩니다. 그러나 받은 복음과 은혜를 전하고 나누어주면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치는 풍성한 교회가 됩니다.
이제 충분히 넓고 좋은 성전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나부터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 성전을 통하여 하느님이 영광 받으시고 우리에게 큰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안양교회 20주년 축하의 글에 정철범 주교님께서는 안양교회를 극찬하셨습니다. 첫째, 뜨거운 신앙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 둘째, 평신도의 책임과 역할이 매우 활성화되고 있는 교회. 셋째, 전도와 선교열이 강한 교회라고 축하하셨습니다.
전삼광(세바스찬) 신부님은 “첫 시작 때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열심히 모이는 교회, 항상 기도하는 교회,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신다.”고 축하의 글을 남기셨습니다.
김근상(바우로) 주교님은 당시 축하의 인사를 통해 “자신은 안양교회를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며 마지막 인사말에 “안양교회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름답게 키워주십시오.”라고 부탁의 글을 남기셨습니다.
저는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나의 직업이 무엇이든, 내가 가진 능력이 크든지 작든지, 내가 가진 재물이 많든지 적든지 상관없이 주님은 우리 모두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다 주님에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나는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할까요? 평범했던 네 명의 어부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므로 위대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물고기 잡는 사람들이 사람을 살리는 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전에 사로잡혀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전은 사람을 바꿔놓습니다. 네 명의 제자들이 주님이 주신 비전을 받기 전에는 자기들이 출생한 지역에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비전을 받고 난 후부터 모험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비전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주신 비전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위대한 비전을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한계에 갇혀서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전은 내 수준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고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비전을 믿고 주님을 따른다면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비전이 위대한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순종은 축복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조건입니다. 순종이 주는 축복을 받은 니느웨 백성들을 보십시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자 죽음에서 삶의 축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의 문은 순종이라는 열쇠를 통해서 열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름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자기의 소중한 것들과 인간관계를 희생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희생이 무엇입니까? 더 소중한 분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은 다 이런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신앙생활에서 호주머니를 비우는 능력이 없으면 바른 신앙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돈 얘기가 참 많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도에 관한 말씀도 있고, 믿음에 관한 말씀도 나옵니다. 사랑에 관한 말씀도 많이 나오지만,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도 적지 않게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서 돈과 소유에 관한 비유가 있음을 생각할 때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려면 물질 씀씀이에서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십일조는 내가 돈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십의 아홉을 가지고 어떻게 쓰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돈을 가지고 내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나의 가치관과 삶의 질이 나타나게 됩니다.
물질을 의지하면 쌓아놓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쾌락을 좋아하면 쾌락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한 일, 좋은 일, 하느님 기뻐하시는 일에 쓸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실 때 그 희생에 대한 대가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희생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하느님은 종인 우리들에게 풍성한 대가를 항상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100년이라는 세월을 희생하며 방주를 만들던 노아는 구원의 대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독자 이삭을 희생하려 했던 아브라함은 이삭을 돌려받았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몸, 우리의 재물, 우리의 자존심 등을 희생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나를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신 다음,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제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의 비젼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즉시 순종하시어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로 날마다 승리하시는 삶의 증거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