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여러분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왜 이 말씀부터 주셨을까요? 19절 앞부분에 보면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했던 것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에게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문을 잠그고 모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모여서 기도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의 소문을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그냥 떠들어댔다고 봅니다. 우리도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가 안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그 순간은 믿음이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로의 인사를 했습니다. 주님은 책망 보다는 위로와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평화를 주셨습니다. 물론 평화 ‘샬롬’이란 말은 유다인들에게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위로요 힘이요,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또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못한 제자들이 있을까봐 그랬는지 아니면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주님은 또 한 번 평화를 빌고,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말하면 너희는 이제부터는 사명자이다. 말씀을 증거 하는 선교사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사도들과 같은 신분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교회의 직분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업도 다 사명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시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까?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명자의 삶을 살면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기쁨이 됩니다. 요즘 자녀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교우들이 많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지만 그 아이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큰 기쁨을 누립니다.왜냐하면 엄마가 되는 것이 큰 사명자의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가지면 어떤 시시한 일이라 해도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교회 직분자가 되어도 사명감이 없으면 참 기쁨도 없고,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22절). 왜 이 말씀을 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참 신앙인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직분 자가 되고, 성직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말씀과 성령을 통해 은혜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거룩한 말씀은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이 말씀은 잘못하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권한은 오직 하느님 외에는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전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이때에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게 되면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서 하지만 우리의 전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열쇠란 복음을 의미하고, 전도를 의미하고, 선교를 의미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달자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침묵함으로 인해서, 내가 전도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책임이 내게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에제키엘 3:18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못되게 구는 자들은 죽는다는 나의 선언을 그대로 전하여 깨우쳐주기만 하면 된다. 못되게 구는 자에게 그 그릇된 길을 떠나 살길을 찾으라고 일러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제 죄로 죽겠지만 너도 내 앞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감동이 되시나요?
우리는 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가 주시는 평화만 받고, 사명은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사명자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주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잠가두고 그냥 있으면 결국 그 피 값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느님이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땅에 묻어두지 않고, 잘 감당하여 면류관을 다 받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제자인 토마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토마야 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영적 얼굴이요, 또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맹목적인 의심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의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은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무서운 독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토마를 통해서 우리들의 의심이 해결되고, 신앙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의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입니다. 일단 의심하기 시작하면 미움이 싹트고 나중에는 부글부글 끓고 터집니다. 거기에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사실 교인들은 말은 않고 있지만 속에는 다 자기의 의견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키워보면 다 자기의 생각이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젖먹이도 자기의 주장이 있습니다.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위험한 것이지만, 그러나 솔직하고 철저한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확실한 토대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이 올 때에 그 의심을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심이 믿음으로 변해야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도마는 의심했을까? 내 눈으로 또 내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토마는 솔직했습니다. 그래서 토마는 의심도 철저하게, 믿음도 철저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사실 의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믿음도 형식적이고, 그저 건성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의심도 철저하게 믿음도 철저하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문제는 토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부활의 주님이 오셨을 때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라고 했습니다(24절).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도 공적 예배에 잘 빠지는 분들, 전화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는 분들은 항상 의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꼭 같은 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어야지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이나 봉사의 그 자리에 있어야지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행사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토마가 의심만 하고 있었다면 그는 불신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의심을 확인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심은 오히려 진리로 인도해주었습니다. 결국 토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위대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마음속에 있는 의심을 해결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토마는 어떻게 변했는가? (1)처음에는 그냥 의심했습니다(25절). 이 의심은 확인이 되면 믿겠다는 조건적 의심입니다. 의심에는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좀 더 알려고 하는 의심도 있지만 절대적으로 못 믿겠다는 그런 의심, 즉 절대적 의심도 있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어” 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의심입니다. 그런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교우들도 조건적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이 나으면 믿겠다.”, “집에 복잡한 일 다 해결하고 그 때부터 믿겠다.” “취직하면 믿겠다.” 등등. 그러나 그 조건이 성취되기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장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믿어야 합니다. 기회는 믿어야 이루어집니다.
토마는 확인하고 싶은 조건을 허락하기도 전에 주님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는 말씀만 듣고 믿었습니다. 토마는 큰 소리로 장담을 했습니다.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그런데 막상 주님께서 토마에게 “만져보고 옆구리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했을 때 토마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믿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토마는 그가 말한 대로 주님의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 그의 말씀만 듣고, 즉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28절).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마음속에서 역사할 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토마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란 말은 경배의 대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주란 말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뜻은 부활 승천하여서 높임을 받으신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나의 하느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 보다 더 위대한 고백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것이 기독교의 뿌리가 되고 사도신경의 근간이 되듯이 토마의 신앙고백은 오늘의 우리들이 본받고, 꼭 해야 할 고백입니다.
진리란 객관적으로도 증명되어야 하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주관적으로도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믿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끝으로 바른 신앙을 갖는 비결은 무엇인가? 기적을 체험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전1:22). 확신은 있지만 주관적이기 쉽고, 자라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가지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전1:22). 이론만 있지, 형식적인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면 바른 신앙을 가지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믿음의 씨앗은 성령께서 택함 받은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믿음의 씨앗은 그냥 잡초처럼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1)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롬10:17). (2)규칙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우리의 믿음은 다 형식적인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3)순종입니다. 순종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순종을 강조합니다. 순종은 마치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것처럼 건강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길러줍니다. (4)증거해야 믿음이 자랍니다. 간증을 해도 좋고, 전도를 해도 좋고, 선교를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소리를 그만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우리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토마는 한 때 의심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즉각적으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토마와 같은 신앙을 소유하여 사명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많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육신을 위해 운동을 하듯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가는 곳마다 주님을 자랑하고, 간증하고, 증거 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