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병상에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병원에 가서 그를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 루가복음 23장에 나오는 강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함께 처형당한 강도 중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때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지금 강도처럼 회개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누구를 강도취급 하느냐? 내가 어디 강도냐? 나는 강도가 아니다”라고 화를 냈습니다. 목사님이 “강도도 구원 받는데 선생님도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니까 그는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회개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존심 하나 때문에 자기는 강도가 아니고 강도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가졌어도 구원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킨 의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완고하게 대항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 선생이었지만 완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마음속에 깨달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 생각에는 분명히 하느님께로부터 온 분이 아니고는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주장하고 지키지 않았다며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갈등을 느끼고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고민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에 혼돈이 왔습니다. 자기는 내내 가르친 것이 율법을 지켜서 하느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어야 행위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로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난다고 말씀했는데 니고데모는 영적인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는 영적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요 3:4∼6)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니고데모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육으로 태어나서 육의 생각인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를 통해서 거듭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기가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걱정 근심이 꽉 들어찼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새로나지 않고 교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새로나지 않고 육으로써 아무리 훈련을 해도 그것은 육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체에 좋은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다고 해서 육체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새로나서 속이 달라져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보고 “새로 나야 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 난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가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서 그 사람이 변화되면 사람의 행동에서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을 좋아하던 사람이 선을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던 사람이 하늘나라를 좋아하고, 교회를 미워하던 사람이 교회를 찾아오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를 보고 ‘아, 저 사람 성령으로 거듭났구나’ 그렇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성령이 역사했다는 증거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났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 다녔지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강한 바람같이 우리속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같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변화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니고데모에게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요 3:14∼1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느님이 불뱀을 보내서 물리게 하시어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회개하고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하자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하느님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매달고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났습니다.”오늘 모든 세계는 사망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고 마음으로 죄의 노예가 되고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인간의 노력과 수단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허락하시나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하기를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셨습니다. 성가 67장 ‘갈보리 산 위에’는 조지 버나드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그는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과 고통을 오직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어느 날 조지 버나드는 십자가에 대해 집중하며 묵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 너무 험하다. 바라보기도 괴롭다’ 그 다음에는 고통 받는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몸찢기고 피흘려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가’ 그렇게 묵상하면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의미가 마음에 너무나 명확하게 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홍수처럼’ 십자가의 은혜가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즉시 펜을 들어 쓴 것이 바로 이 찬송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주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보혈의 은혜, 성령의 은혜가 쏟아집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지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기도할 때 하늘문이 열리고 하느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쏟아지며 우리가 성령으로 새힘을 얻게 되고 능력을 얻고 성령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의 신비한 역사로 영생을 얻게 되고 우리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 땅에서의 생이 끝나면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의 역사로 새로나서 변화받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 받아야 합니다. 이제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바람이 어디로 불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 행위가 변화되고, 마음의 생각이 변화되고, 삶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므로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서 흑암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로 옮겨진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