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오늘 성찬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여러 곡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것, 특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가 찬양입니다. 찬양하라는 말이 간단하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찬양을 중심으로 한 모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경배와 찬양”이라는 트렌드가 하나의 예배로 정착할 정도입니다. 전자악기와 타악기, 그리고 율동을 곁들이면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배가 그것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두 손을 들고 찬양을 부르다가 분위기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크게 웃고 심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웃음과 울음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내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감정에 휩싸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찬양은 단순히 사람의 심리작용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하느님을 높이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을 조건없이 높입니다. 하느님을 높인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예배드리고, 찬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낮추고 하느님 야훼를 높이는 삶의 태도에서 중요한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통찰입니다. 성경은 삶의 이야기입니다. 삶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아서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은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듯이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배와 찬양은 올바른 찬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논리적이든지 결과적으로 똑같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똑같지 않습니다. 동기가 다르면 결과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눈물은 어떤 상황에서나 그런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눈물을 흘립니다. 결국 이런 신앙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게 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 자기의 슬픈 감정을 해소하는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런 “찬양과 경배”는 개인의 종교적 감정만이 모든 신앙을 지배할 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감정에 빠져버려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점점 더 달콤한 것만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감정과 자기 연민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말은 이와 반대입니다. 자기감정과 자기의 업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높이는 겁니다. 그 야훼 하느님은 막연한 분이 아닙니다. 만약 야훼 하느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짠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성서가 말하는 야훼 찬양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느님을 구체적인 행위자로 설명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을 역사 안에서 행동하시는 분으로 설명합니다. 요엘2:26절에서 요엘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준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한다면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책이 곧 구약성경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세상 창조도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노아 홍수도 그렇고 그들을 구원하신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하느님의 그 모든 놀라운 행위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요엘이 말하는 놀라운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습니다. 요엘이 2:21-23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흙, 짐승, 시온의 자녀가 그것입니다. 흙과 짐승과 사람은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핵심입니다.
요엘이 “흙아, 두려워마라, 짐승들아, 두려워마라. 시온의 자녀들아, 기뻐 뛰어라.” 하고 외친 이유는 이스라엘의 자연과 인간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요엘은 예루살렘의 파괴된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초토화하고, 성전이 허물어지고, 모든 문화유산이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 가거나 굶어죽는 일들이 많았습니다(요엘1:17-20). 어떤 장면이 여러분의 머리에 그려집니까? 전쟁입니다. 전쟁만이 아니라 자연재해도 겹쳤겠지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해서 삶의 터전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일은 많이 당했습니다. 요즘 남한은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지만 6,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광경은 그렇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겉으로는 썩 괜찮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전쟁 터, 자연재해로 파괴된 상태와 다를 게 없습니다. 곳간이 무너졌고, 가축들이 울부짖고, 물줄기들이 모두 말랐다는 요엘의 외침이 바로 지금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신적인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요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야훼 하느님에게 감사하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훼께서 다음과 같은 큰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들판의 목장이 푸르게 되고, 포도덩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겨울비와 봄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타작마당에는 곡식이 그득그득 쌓이고 독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라.”고 합니다.(24절) 야훼 하느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먹을거리입니다. 오늘 죽나 내일 죽나 하는 위기 가운데서 이렇게 먹을 게 지천으로 깔리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요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풍요를 즐기자는 말인가요? 26a절에서 그가 “한껏 배불리 먹으며”라고 말한 걸 보면 일단 넉넉하게 먹는 건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역시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몸을 갖고 세상을 사는 한 먹고 마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먹을 것은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엘은 배불리 먹는 것 자체만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배불리 먹는 건 인간이 이 땅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인간은 거기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껏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오늘 우리들은 매우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물질적으로도 풍부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게 바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는 것은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 사용되었을 뿐이지 그것 자체가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배부른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는 야훼 신앙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경험하듯이 배부르다 해서 늘 행복한 것도 아니고, 물론 배고프다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어디까지 배불러야 하는지, 얼마나 부자가 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에 이르면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요엘이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 삶의 우여곡절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야훼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야훼 하느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엘의 말씀 선포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약속입니다. 요엘2:12절이 말하듯이 “진심으로 뉘우쳐” 하느님께 돌아오면 하느님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입니다. 미래의 약속이지만 이런 약속을 믿는 사람은 현실의 배고픔 가운데서도 기쁘게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박꾹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합 3:17,18).
현재 배부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는 환성을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찬양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희망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입니다. 추석을 맞아 생명의 주인이신 야훼 하느님을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