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정의 이혼 문제는 사회적인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하며 결혼하면 서로간의 불화나 의견 충돌이나 성격적인 차이 등으로 이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 중에 이혼의 심각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한평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이혼 문제는 인생이나 가정에 실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의 결합이나 이혼 문제에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우리의 가정을 이혼으로부터 지키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곳, 어느 지역에 가신든지 언제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전례대로 말씀을 가르칠 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여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예수님께 대한 율법적인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적인 올무에 매이게 하여 그의 교훈을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끔 엉뚱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난처하게 합니다. 이혼 문제 역시 답변하기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의도하는 바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시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과연 무슨 대답을 하실까? 그 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도덕성이 결여된 분으로 인식시킬 수 있으며, '이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모세의 교훈에 모순되는 것으로 매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난처한 문제를 정하여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자들로 답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시험에 요지는 바로 '모세의 이혼증서'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배우고 또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편견을 드러내서 율법이 말씀해 주고 있는 율법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는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인용한 모세의 허락은 신명24:1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가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 보낼 수 있지만"이라고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율법이 의미하는 정신과는 모순된 해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해석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모세의 명령은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는 남성들의 아내에 대한 폭군적인 태도로 인하여 허락했다는 뜻입니다.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었다는 것은 아내를 지배하는 남성들의 우월적인 본성과 아내를 자기 소유로 인식하는 그릇된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 같은 남성들의 이기적인 횡포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이혼증서를 허락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천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여자는 남자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임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혼인 역시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지 남성이 위주가 되고 여자가 종속이 되는 불평등한 만남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결혼은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결합입니다. 예수님의 이 결론적인 말씀에 예수님을 둘러서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에서 이 문제를 다시 묻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위적인 이혼은 간음죄에 해당된다는 경종으로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간음죄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많은 여인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드렸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녀들이 주님의 손길로 안수를 받으므로 축복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어머니의 자연스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를 제지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이때에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분별없는 행동에 대해 화를 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의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주님께 데려온 것은 만져주심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안수를 통한 축복은 유다인들에게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해 주었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했을 때도 손을 얹고 안수하여 축복해 주었습니다(창48:13-20).
그런데 이 일이 제자들에 의하여 제지를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나무랐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아마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해 너무 분주하고 피곤하신 주님을 어린이들의 만져주심을 원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예수님을 피곤하게 함으로 귀찮음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동을 예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이 같은 화는 제자들의 어린이들에 대한 인격적인 푸대접, 하느님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의 어린이들을 무시한 것, 그리고 이들 어린이들이 얼마나 주님의 사랑의 대상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함에 대한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인격을 무시해 온 이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교회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탄생한 일도 그 근원이 주님의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어린이들도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라고 하는 선언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의 구원이 부모의 신앙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결코 어린이들의 신앙생활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에 주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어린이들과 같이 순진한 마음'이란 뜻으로 어린이들을 가리키신 말씀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신앙을 본받은 사람'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어린이들을 본받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느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그 마음에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는 있겠지만 어린이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한 나이에 있기 때문에 악에 물들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생각이나 성격이 단순합니다. 단순하다는 말은 마음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쉽게 들어갑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한 믿음으로 하느님을 섬깁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어린이들처럼 순결하고 단순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어린이들도 주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에 대하여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산적이고 기복적인 우리들의 신앙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어린이들로부터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을 배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