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학자는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당시로서는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성경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시편110:1절에 나오는 “주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조금만 연구하였더라면 그가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유익과 대접받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율법학자는 주님이 누구인지 혼동하였습니다. 주님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인줄 알았어야 했고 메시야 예수를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중요한 핵심인 메시야는 외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면서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하십니다. 율법학자가 어떠했습니까? 인사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윗자리를 좋아했습니다. 과부들을 등치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우리도 사는 것에만, 겉 모양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잡아야 할 것을 잡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적용이 가능합니다. 율법학자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대신 예수님 하나만 잡으시기 바랍니다.
유태인에게 “학교에서 지식만 배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았으면서 백과사전밖에 되지 못하는 이유도 지혜라는 한가지를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하느님 붙잡으면 살아납니다. 또한 새벽기도 잡으면 하루가 바뀌는 줄 믿습니다.
율법학자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양떼를 돌보고 섬기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는 자신의 이익에는 밝았지만 하느님의 의에는 밝지 못했습니다. 지도자는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멈추어서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멈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 멈추어 서서 이 길이 맞습니까? 물어야 합니다.
율법학자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성가 399장 가사처럼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라고 쓰여진 것처럼 예수의 피로 영적 정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깨끗해질 수 있으며, 우리들도 십자가 앞에서 깨끗함 받아야 합니다. 교인이 할 일, 교인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영적 정화한 상태로 서 있는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눈덮인 들판을 함부로 걷지 말라. 뒷사람의 길잡이가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따라 오다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예수 믿는 우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길이며, 하느님의 뜻인지를 지도자의 할 일은 나의 길을 누가 따라 오더라도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시고 말씀을 이어 나가십니다. 말씀 속에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개를 넣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드리는 것을 유심히 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헌금생활을 중시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소비 지출을 신용카드로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소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로는 로마12: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듯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로의 말씀처럼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변화받고 싶습니까? 돈쓰는 패턴부터 바꾸십시오. 죤 웨슬리는 "나는 돈주머니가 회개치 않은 사람의 회개는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올바른 헌금정신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만 의식해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연보궤는 나팔처럼 생겼는데, 제사종류별로(9개), 기타 독특한 용도별로(4개) 총 13개의 다른 통이 있어 목적대로 맞는 연보궤에 헌금을 넣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볼 때 교우들이 드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헌금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십일조이며 다른 하나는 주일헌금입니다. 이와 아울러 드리는 생활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기타 헌금과 목적헌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운영은 반드시 교우 여러분이 헌금하시는 “헌금”을 통해서만 운영되어야 합니다. 교회재정을 임대수입이든지 또는 바자회 수익금 등으로 일부 채워서는 안됩니다. 이를 위해 세례교인은 교회의 재정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당시 연보궤는 놋쇠로 만들어졌고 화폐도 지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그 소리를 통해 헌금액이 얼마인지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42절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랩톤 두개는 오늘날 화폐단위로 할 때 약 200원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과부는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이었기에 당당하였습니다. 이같이 헌금의 정신은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 의식하지 말아야 하며 헌금으로 그 사람을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헌금생활은 어떠한가요? 우리의 헌금을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지는 헌금하는 손이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인 율법학자의 모습과 부자들의 헌금하는 모습,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유심히 보셨던 예수님,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생활하는 자세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함을 지적하십니다.헌금 자체는 희생입니다 재물이나 제사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있어야 진정한 헌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헌금은 아까울 정도로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 제대로 드리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아무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액수는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헌금을 통해 희생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2고린8:2 “마케도니아 교회 교인들은 환란과 큰 시련을 당하면서도 기쁨에 넘쳤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은 그들에게 풍성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희생 통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사르밧 과부도 가난한 가운데서 엘리야를 섬겼을 때 하느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헌금정신 통해 희생이라는 귀중한 정신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감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희생할 때 채워 주시는 축복입니다. 헌금은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후 남은 물질인 90%가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90% 쓰게 하시니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헌금 드리면 전체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삶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한 부분이 막히면 다른 부분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히브13:7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러준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듯이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헌금 제대로 드리는 사람이 삶 전체를 드립니다. 안양교회는 여러번의 건축헌금을 없는 가운데도 힘에 부치도록 드림을 통해 많은 감격과 신앙의 성장을 맛보았습니다. 교회와 교우들은 날마다 신앙적이 모험을 하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신앙의 모험을 하십시오. 제대로 헌금 드리는 생활 신앙을 하시기 바랍니다. 헌금은 모험하는 것이며 희생하는 것이며 하느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정신을 가지고 삶을 통해 삶의 능력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