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살기가 참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부채는 늘어가고 국민들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대선 주자들은 대선을 앞두고 공약을 세우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이 나라와 백성들을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이끌어 갈지 궁금합니다. 지금 남녀노소 계층 할 것 없이 깊은 좌절감 때문에 무언가 변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국민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래가 보이지 않자 서로의 갈등이 더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마찬가지로 2천년전 이스라엘도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은 없고, 백성들은 병들고는 가난에 지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주변 강대국들 때문에 갈팡질팡 하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한 때였습니다.
그러한 암흑시기에 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고 외치는 회개의 복음이 유대의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외침 앞에 사람들이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요즘 선거에 보면 유명한 가수나 연예인이 나오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선거도 마케팅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공식은 마케팅! 즉 이벤트를 잘 하면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사업가에게 마케팅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일에는 그런 마케팅이 아니라 영적인 것!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세례요한의 인물이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리에는 신비한 능력! 사람들의 심령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왜 세례요한의 외침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었습니까? 세례요한은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즉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 '저 말씀은 오늘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하며 그 말씀을 받으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레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소원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떠서 갔다 주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종들이 능력을 체험했던 것은 말씀을 구체적으로 수용했기에 그랬던 겁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임하면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그 말씀을 전하는데도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신 구체적인 말씀으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능력을 체험한 데살로니카 성도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겸손했기 때문에 역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그 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 조차 없으며. 그분은 눙력이 많으신 분이시며. 그분은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나를 그분과 비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주인의 신발을 벗기는 일을 종 가운데서도 이방인 종이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기 자신이 바로 그와 같다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였고 그의 말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몰려 와서 회개의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은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라며 외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쳐도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나 세례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왜 회개와 세례가 그들에게 생소하였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의 축복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죄를 지으면 성전에 가서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400년 동안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심령이 말라져서 죄를 짓고 난 다음에도 그 죄를 감지하고 회개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떠난 시대가 당하는 영적 비참함은 바로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예언자는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암 8:11)라고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바로 영혼의 양식인 생명의 말씀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우리 안양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400년간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심령이 얼마나 악해졌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아로 있는 세례란 이방인들만이 개종을 할 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선택받은 자기들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방인들 가운데 유대교로 개종을 하는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설을 퍼 부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 누가 독사의 족속입니까?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회개의 복음을 전해도 나는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의 복음을 듣고도 그 말씀 앞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내게 선포되는 그 말씀 앞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것만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독사의 족속과 하느님의 자녀의 차이는 회개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요한의 선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받아들이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바로 신앙생활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종교입니다. 세례요한의 첫 메시지도 예수님의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11절) 당시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부자는 아닙니다. 아무리 옷이 귀한 시대이지만 옷이 두벌 밖에 없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있다는 사람도 별로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부자는 아니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을 도울 만한 여유가 없다. 좀 더 돈을 모으고, 부자가 되면 그때 가서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나 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니까 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옷 두벌 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옷 한 벌 있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부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굶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면 오늘 먹을 것이 없는 사람 앞에서 부자라는 것입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아무리 가져도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보면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나 보다 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말이 아니고 회개는 외침이 아니라 순종이고 복종이며 충성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라는 치료약인 것입니다. 회개하는 성도와 교회. 회개하는 민족과 나라는 주님이 살리시고 축복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