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동물들의 겉모습은 살아 있을 때와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죽었고 생명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박제가 된 믿음은 종교적인 의식은 잘 행하지만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엘리야시대에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 때 나병환자 나아만 장군의 말씀을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많은 사람이 굶주려 죽을 때 수많은 과부 중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만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느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 대신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극심해서 살아있는 신앙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 빵을 만들어 자기와 자식하고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을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 오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너무나 어려운 부탁을 한 것입니다. 과부는 당황했으나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 엘리야가 하느님의 종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렙다 과부는 하느님 말씀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에 하느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과부가 밀가루 통을 보니 밀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계속 흘러 나와 그 가뭄이 다 지날 때까지 과부와 어린아이, 엘리야는 배고프지 않게 넉넉히 먹으며 가뭄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천하는 믿음에 대해서 하느님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적국인 시리아에 나아만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적으로는 화려했지만 내적으로는 썩어져가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집에 일하던 이스라엘 소녀가 주인의 비참함을 보고 “엘리사라면 그병을 고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소녀의 말에 나아만의 귀가 번쩍뜨였습니다.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병을 고칠지 안고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소녀의 말을 듣고 믿고 실천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모험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박제된 믿음’과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의 형식은 가지고 있어도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믿음이란 실제로 절망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믿고 맡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은 벼랑 끝에 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은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내가 정말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를 테스트해보십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믿을 때 주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때 하느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 같은 확신과 경험이 생기면 그 다음부터는 점점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렙다 과부가 죽음이냐, 삶이냐의 기로에 섰을때 하느님께 맡겼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의 인격이 달려있고 시리아의 명예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종의 말을 듣고 엘리사를 믿고서 찾아온 것처럼 우리들도 믿음의 결단을 보여야 합니다.
항상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없이 내 생각과 내 감각으로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으려면 말씀을 찾아 가십시오. 하느님을 믿으려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느님은 말씀을 떠나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말씀을 달라고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믿으려고 발버둥쳐도 믿음이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 말씀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요한15:7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될 것은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실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 속에서 기적을 빼놓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은 모두 다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믿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령 받고 병 낫는 것도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도 죽은 후 하늘나라 가는 것도 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신앙생활에 적은 기적이든 큰 기적이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적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의식은 잘 알지만 믿음 없는 죽은신앙, 형식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기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종교는 죽은 박제품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어떤 믿음이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왔다갔다 했는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십시오. 구원은 주님께서 하지만 데리고 나오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먼저 “십일조와 헌물을 하라. 그러면 축복은 내가 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혹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복부터 먼저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안 보여주는 믿음에 대해 내가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하시지 않을까요?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 달라고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해서 마음에 불안과 걱정이 있어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머뭇거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주님도 머뭇거리십니다. 주님은 확실히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차던지, 뜨겁든지하라 미지근하면 싫어 뱉어 버리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렙다 과부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리아의 나아만처럼 명예와 권세를 다 잃어버릴지라도 이스라엘 적국의 나라에 가서 엘리사에게 몸을 맡기는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실천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는 기적을 매일 매순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