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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삼일절


용기를 잃지 말아라

작성일 : 2013-10-19       클릭 : 349     추천 : 0

작성자 안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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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계획을 가지고 계획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기도보다 앞선 것이라면 그 계획은 좋은 계획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보면 그런 계획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을 측정할 때 중요한 표준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자세는 하느님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알 수 있지요!!

 

기도를 반대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그 분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아직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필요성,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기도를 중단합니다. 세상에 대한 걱정에 기도를 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임재를 깊이 맛보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로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은 나의 시시콜콜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사실 우리의 생활은 여간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바로 변수이고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루터는 구두수선공이 구두 수선하는 것이 직업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고, 무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또한 비유는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은 1절에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 상황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기도하지만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매일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을 때, 현실이 너무 힘들어 질 때 낙심되지요. 그럴 때 쉽게 기도를 포기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도시에 사는 사람을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도시는 인심이 각박하고, 인간미가 없어지고, 개인주의가 넘치고 살아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거기에 큰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재판관이라는 것은 단순히 재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재판을 하기 때문에 대단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거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하느님도 필요 없고, 사람에게 인정사정도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실재의 일이라기보다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 가정입니다. 권력을 소유한 아주 나쁜 사람을 극단적으로 예를 든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도시에 이 재판관과 대조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과부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홀로된 사람은 경제력도 힘도 그야말로 아무 것도 기댈 것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꿀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약자는 자기보다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이 과부를 괴롭히고 억울하게 한 사람들의 정체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과부는 자신에게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피해를 당한 것이지요. 이처럼 억울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과부가 마지막으로 하소연해 볼 수 있는 것은 법과 공권력인데, 인류 역사상 법이 완전하게 공평하게 행사된 역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 유일한 무기는 끈질기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절박한 과부는 재판관이 출근하는 관가 입구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요즘으로 말하자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늘 그를 찾아가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계속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 합니다.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좋은 재판관이라면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내용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재판관은 고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수는 늘 있습니다. 성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소원대로 판결해 주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끝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 영원히, 목적을 이루기까지”라는 뜻입니다.

 

고약한 재판관은 아마도 그녀의 행동에서 그녀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고약한 재판관은 이렇게 결정합니다.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결국 이 여인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주님은 극단적인 예까지 들은 것입니다. 그렇게 고약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졸라대면 들어주게 마련인데, 하물며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나와 있습니다.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택하신 자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불신자도 기도할 수 있지만 허공에 대고,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태도가 어떤 태도입니까? 말 그대로 밤낮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레 33:3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불러라. 내가 대답하리라. 나는 네가 모르는 큰 비밀을 가르쳐주리라.” 그렇습니다. 기도 중에 강하게 외치고 부르짖는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사의 기도를 말합니다.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느님께 외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밤낮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사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루가11:5-8 한 밤중에 찾아와서 빵을 달라는 친구의 말씀과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무시 당하고 멸시 당하는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나름대로 뜻이 있으신데, 우리 각자의 기도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또 유일한 변수는 기도뿐입니다.

 

사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과부의 사연은 지극히 개인적입니다. 나라를 위한 것도, 이웃을 위한 것도,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 개인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가 모범적인 기도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하느님을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하면 금방 문제가 풀립니다. 우리가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식이 때로는 필요한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는 태도는 청소년들이 자기 방에 들어가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 하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물론 그 요청이 잘못된 것이고, 때가 이르지 않는 것이라면 기도하면서 그것을 철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도조차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만나 대화했다면 그것 자체가 응답이고 올바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무엇입니까? 저에게도 여러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기도로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나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기도하다가 지치면 안 됩니다. 과부처럼 결사의 기도를 합시다. 기도가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삶도 변화시킵니다. 교회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내리시고 나서 어떻게 보면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다름 아닌 기도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중단 없이 결사의 기도를 하는 믿음이 점차 사라져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서구 교회에, 그리고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결사의 기도의 믿음 말입니다.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키고, 기도만이 살길이고, 기도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내 인생이 새롭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이 탄식이 되지 않고 올 해도 얼마 남지 않은 날 동안 여러분의 기도하는 것들이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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