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지금 임종을 맞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이제 죽는 시각인데 재산이 소용 있습니까? 지식이나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오직 하나, 내가 하느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설 것인가? 지금까지 하느님께 올바르게 살아왔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올바르게 살고 싶어 합니다. 아니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주지 않습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진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틀림없는데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길이요 성도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갈 때에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에 예배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느님께 경배하고, 하느님을 만나며, 하느님께 나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예배함으로 하느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부인하는 한, 나의 존재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알 때에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예배하는 동안에 내가 나를 알게 되고, 나를 찾으면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예배만은 성실해야 됩니다. 여기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고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둘 다 하느님께 올바르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각각 자기를 돌아봅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성찰하고 하느님과의 관계인 선,의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 내용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볼 때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하느님께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다가 마침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의 예배는 실제로는 예배하는 겉모습뿐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이 올바르게 살지 못하였음을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고백합니다.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죄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죄인입니다 하며 부르짖던 그는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예배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느님께 예배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데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십니다. 이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오, 하느님이여" 하고 한마디 불러 놓고는 "저는..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종일관 저 자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하느님도 못보고 이웃도 보지 못합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 서서' 기도합니다. 나를 구별하고,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남보다 내가 더 의롭다, 내가 더 진실하다고 구별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순간에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점마다 ‘원조’라는 말이 씁니다. 자기 식당을 알리려는 것이죠! ‘명품’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 남들에게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이러한 구별 의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너는 특별하다.’ 이렇게 자녀를 교육하다가는 보통아이들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특별하지 않고. 내 자식도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나를 특별히 구별지어 생각하는 마음 자체가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우상인 분들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꽤나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며, 일 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고 보란 듯이 기도합니다. 나만이 특별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멸시 경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의로움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과 자신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랑하던 바리사이파 사람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하느님께로부터, 혹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려는 보상심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다른 말보다 오히려 자신을 "죄인이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분명 바리사이파 사람이 세리를 경멸하는 기도를 들었을 텐데 세리는 그 소리를 듣고도 '나는 죄인이'라고 기도한 것이라면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나는 죄인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멸시하면 대개 '나만 죄인이냐? 너는 더 나쁜 죄인이다'하고 덤비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회개하던 진실된 마음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인데 세리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래 나는 죄인다. 라고 고백합니다.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서요, 로마군인 때문이요, 세상 경제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사회 때문이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그렇다. 라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하느님! 내가 죄인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세리는 하느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괴로움만 드렸으니 하느님께서 화를 푸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저에게는 더 기대할 것도 없고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와 긍휼을 기대하는 자세입니다. 지난날에는 잘못을 했지만 앞으로는 잘할 것이니 한번만 눈감아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고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자비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기도를 하겠습니까? 혹시 말이 너무 많거나 소원이 너무 많지는 않은가요? 지금까지 거짓말도 많이 쌓이지 않았나요? 이제는 무슨 기도를 하려하십니까? 예배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나를 생각합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더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죄 많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한마디면 족합니다. 죽어 가는 강도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면 그뿐입니다.
우리 기도 중에 어떤 때에는 불평과 원망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느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대할 때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러분, 무엇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예배는 성실하게 드려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도 불쌍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예배를 드렸지만 마음으로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 역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배만큼은 성실하고 알차야 합니다.
정성으로 예배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 모두 죄사함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기도와 신앙 / 생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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