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목)은 스테파노의 순교자 기념 축일. 28일(토)은 ‘죄없는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지켰습니다.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 성탄주간에 기쁨과는 거리가 먼 순교, 죽음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기쁨과 슬픔은 늘 함께 오는 것이기에, 슬픔을 거부해 버리면 참된 기쁨 역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일까요? 아마도,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하는 모습과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부당하게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과 너무 비슷하기에 그러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라고 기도를 드리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스테파노 성인 역시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드리며 순교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죄없는 어린이들이’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죄가 있다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혹 있다고 해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헤로데의 욕망,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지닌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억울하고,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생겨서는 안 되는 그런 부당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병든 사람을 고쳐준 죄입니까? 가난하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과 어울린 죄입니까? 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죽을 정도로 큰 죄입니까? 그럼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분명, 그 당시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이유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무죄한 어린이들이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가 똑같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의 복음이 세상 많은 곳에 전해진 오늘날에도 주님을 구세주요, 사랑의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오늘날에도, 매일 죄없는 어린이들의 죽음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로데가 없는 이 시대에 왜 죄없는 어린이들은 계속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탄 주간으로서 지난 토요일(28일)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축일 감사성찬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죄 없는 어린이들이 학살당하는 내용을 함께 보게됩니다.
사실 순교라는 것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 어린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한 어른의, 그것도 한 독재자의 헛된 믿음으로 인해 어린이들이 희생당한 것이죠.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통해 마태오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고, 또 우리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입니다.
성서에는 분명한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야기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도 그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아기 예수 탄생의 배경입니다. 그 배경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결코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이야기가 뭘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첫 번째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헤로데 왕마저 모든 아기들을 죽일 정도로 아기 예수 탄생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모든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어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구세주이신데, 헤로데는 왜 두려워하는가.
자신의 힘(권력, 돈, 명예, 지위)으로 모든 권세나 지위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구태여 세상을 변혁하러 오는 구세주를 바라지 않겠죠. 자신이 곧 변혁의 대상이니까요. 헤로데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두 번째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마리아와 요셉은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고향을 등지고 타국에서 삽니다. 고향을 떠난 타향살이는 곧 갖은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축복의 신앙이 아니라 고난의 신앙입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그것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가르치기를, 버릴 때 얻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목숨을 버렸을 때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 떠날 때 새 세상을 비로소 만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굴욕 당하는 종의 생활을 거부하고 이집트를 떠났을 때 고난은 시작되었지만, 희망의 땅 가나안에 비로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버리지 않았는데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떠나지 않았는데 절대 다다를 수 없습니다. 기다리지 않았는데 절대 오지 않습니다.
세 번째 모든 죄 없는 아이들이 헤로데에 의해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것으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마태오는 말합니다. 곧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의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네 뜻이 아니라, 네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의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짧은 예수 탄생의 배경 이야기지만, 오늘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싸구려 축복과 구원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 신앙 갖고는 절대로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무섭고 무거워서 스스로 못 짊어질지언정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항상 내 생활을 조명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주간에 고난과 죽음의 배경을 말씀하심으로우리가 이 죄없이 죽어간 아이들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지켜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가 실현됨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데, 그게 구원이죠. 여러분의 신앙이 하느님의 계획에 일조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없이 그저 내 힘으로, 내 노력과 의지로 무엇을 해보려는 나의 열심으로는 결코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갔다”(마태2,14)고 했습니다. 저는 이 밤을 한 가정의 고뇌의 시기이며 한 어머니가 생명을 선택하는 귀로라 여겨집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진리를 선택한 길에 있어서 자신의 애욕과 집착과의 정면 승부이며 여기서 그 빛의 승리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한 생명에서 시작되며, 그 집안은 하늘의 축복으로 행복을 일구어 질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부도덕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 다른 헤로데가 되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다른 요셉이 되든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이 오신 성탄 주간으로 이 한 해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죄 없는 어린이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도 돌아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오는 2014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각자의 신앙의 열매를 맺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와 신앙 / 생활묵상




작성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