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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삼일절


하느님 어린양 새롭게 하소서

작성일 : 2014-01-18       클릭 : 388     추천 : 0

작성자 안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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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이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분통이 터질 것 같습니다(북한, 정치인. 등등) 그런데 그보다 더 분개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고도 사람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소임을 철저히 수행한 참 예언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감격해서 외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세례 요한의 이 감격이 오늘 여러분의 감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이러한 칭호를 사용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어린양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즉 ‘어린양’은 대부분 희생제물로 나타납니다.

 

어린양은 예수님의 흠 없고 죄 없으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희생양이 되신 것에 대한 감동과 세례요한이 주님을 보는 순간 외치던 감격의 순간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당신을 믿는 자의 죄를 없애시고, 거룩케 하시는 구속의 사역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한마디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수난, 그리고 승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를 보고 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것은 유다인 세례를 받았어도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들이 원하는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요한에게 나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물로 씻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세상적인 기대일 뿐, 하느님의 어린양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당시 유다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신앙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고백에 따라 세례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여전히 물질 축복, 건강축복, 자녀에 대한 축복 등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물론 "예수 믿고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린양을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나 자세가 없이 단지 신앙고백 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신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난 뒤, 생각이나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내용은 그대롭니다. 단지 포장만 바뀌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포장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안에 더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닌 전 삶의 목표를 주님께 맞추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3:14)

 

요한이 예수님과 먼 친척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세례를 주는 것이 곧 이 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을 통해 이분이 이스라엘 중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유다인들은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해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사의식으로 그들이 깨끗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그들은 부정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짐승을 잡아도 정결하게 되거나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반복된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물로 씻음을 받으면 깨끗해집니까? 죄를 자백하고 물속에 잠겨보지만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뒤돌아서면 똑 같은 죄를 다시 반복합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물세례가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한 신앙고백에 의해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다짐을 받습니다. 세례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 대해 교훈합니다.

그런데 사실 물세례 받고, 변화되어진 사람을 본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례 받을 때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임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고백과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될 것이며, 성령으로 주는 세례는 물로 주는 세례와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물로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성령세례는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요한이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대신해서 희생당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회개하고 눈물 흘리고 뒤 돌아서서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서 뒤돌아서서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안됩니다. 예수 잘 믿으니까 복 받게 해달라고 맹목적으로 간구하면 안됩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면서 기도해놓고, 뒤 돌아서서 물질축복에 얽매여 사는 삶을 살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복받고 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우리의 가치관도 변하고 우리의 삶의 모습도 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받았을 때 버리지 못했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진 모습이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했다고 안심하면 안됩니다. 물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신자가 되었다고 믿으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냉담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증거한대로 예수가 그렇게 위대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예수께서 다니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요한은 또 외쳤습니다.

 

사실 죄를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도 누가 죄에 대해 언급하면 반발심을 갖습니다. 전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을 때 아마 그들 중에 상당수는 불쾌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위로 받고, 용기를 얻는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죄를 지적당하고, 회개를 촉구하면 싫어합니다. 그리고 '신부님 왜 치는 설교를 하실까?'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면 당시 세례요한의 설교에 냉담했던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들만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두 제자가 관심을 갖습니다. 기껏 제자훈련을 시켜 놓았더니 한순간에 예수를 좇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관심은 예수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처를 묻습니다. 거처를 물었다면 주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강한개인주의가 결국 자기 중심적인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하거나, 주님의 거처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마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진리를 듣고 싶어했던 이유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책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들의 영혼을 살리는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러다 대학에 떨어지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업과 생업하시는 교우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망하지'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가게 문닫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주께서 대학에 떨어지게 하고, 사업을 망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신 것을 보고 그 날은 거기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주님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습니다. '와 서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온 것은 생명을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인생을 사는 동안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어디계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와서 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합니다.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난 것 같은데 삶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왕좌왕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갈 수 있으면 좋고, 안나가도 크게 마음 쓰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마음속에 주님을 만난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안드레아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를 주님께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도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장차 변화되어질 나의 모습을 기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장차 변화되어질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어떻게요? '와서 보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한번 들러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 가운데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모든 삶이 바뀌고 변화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의 초청을 감사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고 미루지 마십시오. 와서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고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외치던 세례 요한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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