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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아이의 손을 놓지 마라 -책추천

작성일 : 2011-01-22       클릭 : 649     추천 : 0

작성자 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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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모를 거부하는 아이들
 
부모 역할의 비밀은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하는지가 아닌, 아이에게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에 있다. 아이가 부모와의 접촉과 친밀감을 원하면 부모는 양육자로서, 위안자로서, 인도자로서, 모범으로서, 교사로서 혹은 코치로서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된다. 애착관계가 잘 맺어진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으로 모험을 떠날 때의 베이스캠프이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은신처이고, 영감의 원천이다. 아무리 뛰어난 양육 기술도 이 애착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지향성이란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주변 환경에 익숙해지려는 충동으로,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이자 욕구이다. 애착과 지향성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애착을 형성한 대상을 따름으로써 자동적으로 지향성을 설정한다.
아이들은 다른 항온동물의 새끼들처럼 지향 본능을 타고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서 방향감각을 배워야만 한다. 자석이 자동적으로 북극을 향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권위와 접촉, 따뜻함의 근원을 향하는 욕구를 지닌다. 아이들은 인생에서 그런 대상이 없다는 사실, 즉 지향성 결핍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어른 동물이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듯이, 부모 혹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어른이 바로 아이의 지향성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칼융은 부모-자녀 관계에서 일어나는 무언가가 아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부모-자녀 관계에서 '결핍'된 부분이 아이의 인격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람인 어른의 자리를 또래가 대신했을 때 어른과의 관계에서 결핍된 부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또래가 채워줄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포용, 양육에 대한 욕구, 상대를 위해 분발하고 노력하는 능력, 상대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마음이다. 이 부분의 결핍은 아이들에게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안겨준다.
 
심리적인 지향성 또한 인간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실제인지,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좋은 것인지,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스스로 방향을 정할 능력이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애착이 바로 그런 도움을 준다. 애착의 첫 임무는 아기가 붙어있던 사람에게서 떨어져 지향해야할 나침반 방위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이는 나침반 방위를 이용해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면 방향을 상실한 혼란은 느끼지 않는다. 활발한 내면의 본능이 아이로 하여금 계속 이 나침반 방위 가까이 있도록 강제한다. 애착은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기댈 수 있게 해 준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길을 잃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나침반 방위와의 접촉이 끊기는 일이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거나 지향해야 할 대상이 없는 지향성 결핍은 인간의 뇌가 결코 견딜 수 없는 상황이다. 어른들조차 인생에서 그들의 나침반 방위 역할을 하는 대상과의 접촉이 끊기면, 방샹성을 상실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2. 부모역할은 어떻게 약해지는가
 
아이에게 책임을 돌리지 마라.
아이의 문제에 대해 부모를 탓하지 않으려면, 아이가 이상하다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결론내리면 된다. 우리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이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위안을 구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부모로서의 역할에 좌절할수록, 아이들을 더 까다롭다고 여기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꼬리표들을 더 많이 찾게 된다.
'꼬리표 붙이기'가 위험한 것은('까다로운 아이' 또는 '민감한 아이'라는 일상적이고도 악의 없는 꼬맃표들의 경우조차)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덮어버린다. 기저에 깔린 관계적 요인들을 무시하고 문제에 대한 진단을 내린다면, 진짜 해결책을 찾는 일은 당연히 지연된다.
 
부모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이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가 아니라 아이와 자신들의 관계에서 무엇이 부족한가이다.
 
애착의 일곱가지 역할
1. 애착은 부모와 아이 사이의 위계를 잡아준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지 않고 자신의 어려움과 감정적 욕구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2. 애착은 부모역할의 본능을 깨우고, 아이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며, 부모의 참을성을 키워준다.
 
3. 애착은 아이의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모든 부모 역할의 기초는 아이가 우리를 쳐다보게 하고 우리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이다. 아이의 뇌는 대부분 무의식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주의를 기울일 대상의 우선순위를 배정한다. 아이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착이기 때문에, 이 애착이 아이의 주의를 조정하는 중심 역할을 한다.
주의를 애착을 따라간다. 애착이 강할수록, 아이의 주의를 확보하는 일은 더 수월해진다. 애착이 약하면 아이의 주의를 끌기 어렵다. 주의력결핍장애 현상은 또래지향성이 지배적인 곳(도심지와 대도시 저소득층 거주지역의 학교들)에서 더 심각하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다.
 
4. 애착은 아이와 부모의 친밀감을 유지시킨다.
 
5. 애착은 부모에게서 모범을 찾게 만든다.
아이는 강하게 애착을 형성한 사람들을 자신의 모범으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그들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애착 대상과 같아지려는 친밀감의 욕구는 아이를 가장 중요하고 자발적인 배움으로 이끌어낸다. 이런 배움은 부모가 가르치려는 의식적인 의도나, 아이가 학습한다는 생각 없이 이루어진다. 애착이 없는 경우에 배움은 고역이 되고 가르치는 일은 억지가 된다. 아잉가 습득하는 모든 단어를 부모가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모든 행동을 의식적으로 일어주어야 하고, 모든 태도를 의식적으로 심어주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히야 하는지 생각해보라. 애착은 부모나 아이에게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을 요하면서 이런 일들을 자동적으로 완수한다. 매력적인 강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래가 지배적인 애착 대상이 되면, 당연히 결과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없이, 또래들이 우리 아이들의 모범이 된다.
 
6. 애착은 부모를 주요 본보기로 지정해준다.
아이는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본을 따를 수 잇을 때까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보여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신호를 찾는다.
이 때엔 가르침이 얼마나 명확한지 보다는, 아이의 애착 프로그램이 누구를 따라야 할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는지가 결정적이다. 방향을 잘 가리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지표로 삼는 대상이 우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현명하고 분명하게 방향을 일러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부모와 자녀간의 애착을 상실하면 아이는 더 이상 우리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
 
7. 애착은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게 만든다.
양육을 위해서, 애착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은 아이에게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욕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아이를 '착하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아이의 내적인 특성을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의 착한 성격을 키우는 것은 아이의 어른에 대한 애착이다.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충동은 아이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이가 맺고 있는 관계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이가 '나쁘다면', 고쳐야 할 것은 아이라 아니라 관계이다.
 
 
애착은 자연적이며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만, 보상과 같은 지렛대 역할을 하는 수단은 인위적이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다.
아이를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하거나 싫어하는 것 또는 불안함을 악용할 때마다 우리는 무력을 사용하는 셈이다. 우리는 정다한 수단(고유한 자극이나, 기댈 만한 애착)이 없을 때 지레에 의존한다. 이런 방법은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 좋다. 또한 절대로 상투적인 수법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이들이 도래지향적으로 돌아설 때 부모들은 필사적으로 지레의 힘에 매달린다.
이런 방법은 일시적으로 말을 듣게 만들 수는 있지만, 바람직한 행동이 고유한 인격의 일부가 되게끔 만들 수는 없다. 고맙다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하기, 다른 사람과 나누기, 선물을 하거나 카드 보내기, 방 정리하기, 감사하기, 숙제하기, 피아노 연습하기 등의 모든 행동은 강압적으로 하게 만들면 자발적으로 하게 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부모와 교사는 또 다른 지레 수단을 고안해야 한다. 이리하여 악순환이 시작된다. 부모 힘의 진정한 기반은 무너진다.
보상은 행동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보상이 계속 주어질 때만 그렇다. 보상이 없어지면, 게임을 멈춘다.
 
3. 아이의 발달을 가로막는 아이의 친구들
 
아이들은 또래에게서 가장 잘 배운다.
또래들이 어른보다 모방하기 쉽고 그만큼 아이들이 또래지향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생각하는 법, 개성의 중요성, 자연의 신비, 과학의 비밀,
인간 존재의 의미, 역사의 교훈, 수학의 논리, 비극의 정수 같은 소중한 가치가 아니다.
또래처럼 말하는 법, 또래처럼 걷는 법, 또래처럼 입는 법, 또래처럼 행동하는 법, 또래처럼 보이는 법을 배울 뿐이다.
 
취약성을 만들어내는 건 또래들의 무신경한 행동이나 언어가 아니라 애착이다. 또래들의 거부나 도래들의 수용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연구들은 애착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주요 애착을 형성하고 있으면, 아이들의 잔인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탈애착은 방어적인 목적을 가지며 한 가지를 의미한다. 즉, '당신의 부재를 경험하는 일은 너무나도 큰 상처였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 감정의 딱딱한 껍데기 속에 나를 집어넣을 것이다. 절대 그런 상처를 또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보울비는 부모가 곁에 있어도 스트레스, 불안, 우울, 다른 일에의 몰두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부재중일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건 단순히 부모가 같이 있어주는게 아니라, 정서적 접근성이기 때문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많은 불안감을 경험한 아이는, 주된 존재 방식으로서 초연함을 채택한다. 부모가 아이와 살아있는 애착을 형성했을 때,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은 아이들로 하여금 그런 절망적인 수단을 채택하지 않게끔 지켜준다.
 
우린 어떻게 아이들의 성숙을 도울 수 있을까?
놀랍게도 성숙의 비밀도 애착에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생물체에게 애착은 최우선 사항이다. 이 최초의 급선무를 해결하고 났을 때에만 성숙해질 수 있다. 식물이 성장하려면 먼저 뿌리가 내려야 하고, 그리고 나서야 열매를 맺는 것이 가능해진다. 아이들은 애착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서야, 분리된 존재로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애정을 듬뿍 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랄 것이다.
 
독립성을 키우려면 먼저 의존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개별화를 촉진시키려면 먼저 소속감과 일체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독립하는 것을 도우려면 아이와의 친밀감을 유지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아이와 접촉하고 결합함으로써 아이가 독립할 수 있게끔 도울 수 있다. 우리는 아이가 포옹을 원하면 아이가 우리를 안는 것보다 더 포근하게 안아준다. 아이가 잠들거나 학교를 가는 일과 같은 분리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친밀감의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아이를 돕는다. 이런식으로 성숙의 과정은 역설이다. 의존과 애착이 독립과 진정한 분리를 양성한다.
애착은 성숙을 낳는 자궁이다. 생리적인 자궁이 신체적인 의미에서 분리된 존재를 낳듯이, 애착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분리된 존재를 낳는다. 아이의 탄생 후 발달 단계상 필요한 것은 아이에게 정서적 애착의 자궁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거기서 아이는 애착충동에 지배받지 않고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개인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난다. 이간은 절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 욕구를 무시한 채 성장할 수 없으며,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독립적인 개체가 되기 위해서는 아동기 전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 시대에는 그 시간이 적어도 십대 후반, 어쩌면 그 이상까지 연장된다.
아이들은 애착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의 에너지가 진정한 독립적인 개인이 되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그랬을 때에만 아이는 마음껏 앞으로 나아가고, 정서적으로 자라난다. 애착에 대한 굶주림은 신체적 굶주림과 매우 유사하다. 애착에 대한 욕구가 없어지지 않듯이, 음식에 대한 욕구는 절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를 먹어야 할 책임도 있으면서, 앞으로도 식량 공급은 문제없을 거라는 안심도 시켜주어야 한다. 아이의 애착 허기를 충족시키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이처럼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건강한 정서적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영양분이다. 부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마음 속에 자신은 부모가 원하고 사랑하는 바로 그런 존재라는 확신이 심어져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고, 달라져야 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부모의 사랑은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아이는 심술을 부리거나, 불친절하게 굴거나, 우는 소리를 하거나, 비협조적이거나, 철저히 무례하게 굴 수도 있지만, 부모는 여전히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아이는 자신의 불안하고, 가장 환영받지 못할 만한 성격들을 부모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전적으로 만족스럽고, 안정감을 주는,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아이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에너지의 전환을 위해 아이는 충분한 안정감, 충분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발달 체계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또래지향성이 성장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이유
 
1. 부모의 보살핌이 통하지 않는다.
또래지향성은 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보살핌이 통하지 않게 만든다.
아이의 애착 욕구를 기꺼이 채워주는 또 채워줄 수 있는 사람과 활발한 애착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의 애착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또래 애착은 불안정하며 아이에게 휴식을 주지 못한다.
또래들은 끊임없이 승인과 사랑, 중요성을 찾아 헤매는 아이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또래지향성은 안정 대신,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아이의 또래지향성이 강할수록, 그 밑에 깔린 불안함은 그만큼 더 깊이 스며들고 만성화된다. 또래들과 아무리 자주 접촉하고 연락을 해도, 친밀감이 당연하게 생각되거나 굳게 유지되지 않는다. 또래들의 인기에 연연하는 아이는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고, 호의적이지 않은 말, 표정, 몸짓에 위협감을 느낀다. 또래관계는 그 조건부적인 특성 때문에 아이의 새로운 자아 성장을 촉진하지 못한다.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어른과의 애착이 안정적인 아이들 사이의 우정이다. 어른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아이는 또래와의 우정에서 여분의 만족감을 얻는다.
 
3.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다.
전환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아이는 충분한 만족감을 느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충만감이 충분히 스며들어야 한다. 이 느낌은 어떻게든지 아이의 뇌에 새겨져야 한다. 이것은 인식에 의한 것이거나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정서적인 것이다. 아이를 움직이는 것은 정서이다. 에너지를 하나의 발달 현아에서 다음 현안으로, 애착에서 개별화로 전화시키는 것도 정서이다. 문제는 만족이 충분히 스며들려면, 아이는 깊게 그리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는 감각을 차단한다.
아이가 충만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공허함을 느껴야 하고, 도움 받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도움을 필요로 해야 하고, 완전함을 느끼려면 먼저 불완전함을 느껴야 한다. 재회의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해야 하고, 위로 받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 받아야 한다. 충분한 만족감은 매우 기분 좋은 경험이지만 필수 전제 조건으로 상처입기 쉬운 예민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애착 결핍 상태를 느낄 줄 모르면, 보살핌 받고 충족되는 느낌을 모른다. 내가 아이들을 평가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점은 상실감을 느낄 줄 아는가이다. 아이들이 상실감을 느낄 줄 알고 그 공허함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건강함을 나타낸다. 의사표현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할머니가 날 못 알아봐서 마음이 아파요."
"엄마는 제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개가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많은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경험하는 데 너무 방어적이고, 정서적으로 너무 폐쇄적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상실한 무언가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무엇을 상실했는지 느낄 수 있고 알아야만 끊임없는 애착의 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래지향성의 결과로 취약성에 대해 방어적인 아이가 되었을 때,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된다. 그것이 또래지향성의 비극이다. 또래지향성은 우리의 사랑과 애정을 쓸모없거나 충족적이지 못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족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것은 없다. 무슨 일을 해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많은 관심과 인정을 쏟아 부어도 달라지지 못한다. 이는 부모의 입장에서 매우 비관적이고 지치는 일이다. 부모에게는 자신이 아이에게 충족감의 원천이라는 느낌처럼 만족스러운 일은 없다. 많은 부모들이 그런 경험을 빼앗기고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보살핌을 다른 곳에서 구하거나, 충분히 만족할 줄 알게 하는 취약성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아이들은 발달의 첫번째 단계에 갇히고, 미성숙에 갇히고, 기본적인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만족을 위해서는 늘 자신의 외부에 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지한다.
사람의 정서적 기능이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지배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집착이나 중독이 성숙의 과정을 대체하는데, 이런 경우 또래와의 결합에 집착 혹은 중독된다. 그 결과, 대개는 더 잦은 접촉에 대한 성마른 열망만 남는다. 더 많이 접촉할수록 아이는 더 많은 접촉을 갈망한다.
 
4.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포기할 줄 모른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그에 따른 낙담과 슬픔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야 우리는 남은 삶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성숙한 애착의 존재인 아이들은 당연히 애착을 느끼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충동을 경험한다. 정서적 뇌의 내부 깊숙이 그런 일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새겨지고 나서야, 조급한 마음은 풀어지고 집착은 끝이 난다. 그 반면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이는 강박적인 애착욕구에 붙들린 채 계속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할 것이다.
에너지의 전환을 위해서는 만족감과 마찬가지로, 부질없음에 대한 인식이 새겨져야 한다. 이런 전환이 일어나면 아이들은 수용할 줄 알게 되고, 좌절감을 벗어나 세상에 대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부질없음에 대해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뇌의 감정 회로의 핵심인 변연계의 중심에서 민감하게 느껴야 한다. 감정이 예민한 사람만이 부질없음을 느낄 수 있고, 그래야 자신의 한계와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다. 부질없음에 대한 감각은 아이가 취약성에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진다. 따라서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서가 매우 부족하다. 실제로 또래와의 관계는 절망과 상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실망, 슬픔, 비탄의 느낌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5. 또래지향성은 개성을 말살한다.
또래지향성은 또 다른 잔인한 방식으로 성숙을 위협한다.
'개성'은 심리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되는 과정의 열매로서, 개인의 독특함이 만개할 때 절정을 이룬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차별화 혹은 개별화라고 부른다. 한 개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의미, 자신만의 생각과 경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호, 원칙, 의도, 관점, 목표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점유하지 않은 공간에 서는 일이다. 개성은 진정한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진정으로 성숙한 개인들만이 다른 사람의 독특함을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완벽하게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개인의 권익을 공동체의 권리와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철학체계이다. 얄궂게도, 또래지향성은 진정한 개성을 훼손시키면서 개인주의를 부추긴다.
이제 막 싹튼 개성과 독립심은 보호받아야 한다. 흥미, 호기심, 독특함, 창조성, 독창성, 천진한 감탄, 새로운 생각, 스스로 하기, 실험하기, 탐구하기 등등 이제 막 시작한 심리적 성장의 등장에는 매우 상처입기 쉬운 뭔가가 있다. 그런 등장에는 거북이가 그 머리를 밖으로 내밀 때처럼,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특징이 있다. 우리의 솔직한 진짜 모습을 과감히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완전히 노출되는 셈이다. 그 반응이 너무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일 때, 이런 등장은 재빨리 자취를 감춘다. 매우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격성의 원동력
사람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좌절감이다. 좌절감은 공격성의 원료이다. 좌절감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이 부재할 때에 공격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래지향성은 아이에게 좌절감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평화적인 대안을 찾을 가능성도 감소시킨다.
좌절감은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느끼는 정서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수록 '그것'은 뜻대로 돼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만큼 더 감정적으로 동요된다.
좌절감을 유발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이들에게 좌절감의 최대 원천은 뜻대로 되지 않는 애착이다. 즉 혼자 버려진 느낌, 부모와의 대화 부재, 무시 등이다.
 
뒤로 애착 형성하기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애착을 향해 솔직하게, 앞으로, 있는 그대로 접근한다. 그는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욕구와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또래지향적인 왕따 가해자에게는 "난 너를 좋아해" "넌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네가 없을 때는 보고 싶어" "네가 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왕따 가해자느 절대 애착에 대한 충족되지 않는 허기를 인정할 수 없고, 대부분 이것을 의식적으로 느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왕따 가해자는 어떤 식으로 애착을 형성할까? 왕따 가해자는 좋아하는 아이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그 아이를 멀어지게 한다. 이런 접근법은 자신이 상처받거나 거부당할 위험이 그만큼 적어진다. 이렇게 되면 왕따 가해자는 그 결과에 대해 초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원하는 관계에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특히 자신이 정말 원하는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고 멀리한다. 남몰래 자기가 따르고 싶은 사람을 모방하는 대신, 다른 아이들을 놀리고 흉내내며 조롱한다. 감정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람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비밀을 지킨다.
 
우리는 아이들끼리 어울리게 함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키울 수 잇다는, 위험이 따를 정도로 순진한 생각을 해왔따. 우리는 '파리대왕'과 같은 상황의 무대가 준비된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고아로, 학교를 일일 고아원으로 만들고 있다.
왕따 가해자를 선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애초에 그렇게 만든 역학을 뒤집는 것이다. 즉 아이를 적절한 애착 위계로 재통합시키고, 아이의 방어막을 약화시키고, 애착 허기를 채워준다. 이것은 성공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피해자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도 역시 그들을 책임 있는 어른들에게 의존하도록 재통합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상처입기 쉬운 취약성을 느끼게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한다. 또래지향성이 강해서 어른에게 기대지 못하는 아이들이 가장 위험하다.
 
애착에 굶주림으로써 강해지는 성적 욕망
순리적으로 볼 때, 성은 아이들과 그들을 책임지는 어른들 사이가 아닌 성숙한 존재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들이 어른과의 정서적 친밀감을 구할 때 성적 상호작용을 할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또래지향적으로 변하면, 접촉에 대한 갈망이 성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성관계는 또래 애착의 수단이 된다. 부모의 자리에 또래들을 대체시킨 아이들은 성적으로 몰두하거나 활발한 성행위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모와의 친밀감이 부족한 아이들은 또래들에게서 친밀감을 구해야만 하는데, 바로 성관계를 통해서 구하게 된다.
성은 기본적인 애착 욕구의 충족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도구이다. 애착 형성의 첫 번째 방식은 신체적 감각을 통한 것이다. 아이가 주로 신체적 접촉에 의한 친밀감을 구할 때, 성은 매우 효과적이다. 배타적인 소유권과 충성심을 추구하는 아이에게도 성적 상호작용은 매우 유혹적이다. 누군가에에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아이에게는 자기 지위나 매력을 확인받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되고, 성이 득점을 유지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물론 성적 접촉은 따뜻한 느낌과 진정한 친밀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미성숙하고 또래지향적인 십대들에게는 거의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에는 예민함과 성숙이 없어서, 애착 형성의 가장 높은 두 가지 형식에 이를 수가 없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이 하는 성행위의 목적은 사랑을 나누거나 2세를 만드는게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서 구해야 할 것(접촉과 결합)을 서로의 품 안에서 찾는 것이다. 또래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결국 아기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성은 애착 허기를 영원히 충족시킬 수는 없지만, 순간적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중독이 될 수 있다.
 
성은 가장 최후의 애착 행동이고, 독점성의 끝이며, 연인이 도달하는 종결점이다. 성은 성숙한 개인들이 했을 때에만 안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또래지향적인 십대들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 즉 성숙이다.
성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성숙의 첫 열매는 개체로서의 독립이다. 건강한 결합을 위해서는 일단 독립이 요구된다. 다른 사람을 초대할 수 있을 만큼, 혹은 다른 사람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율성을 소중히 여기고, 개인의 한계를 경험하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어야 한다. 건강한 성을 위해서, 우리는 성적으로 휘말리지 않을, 혹은 강요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스스로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청소년은 위험스러운 정도로 성에 영향 받기 쉽다.
성적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의 독립에 대한 존중이, 다른 어떤 영역에서보다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성숙한 성적 상호작용의 필수적인 요소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이 성에 너무 일찍 뛰어들었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고 이용당하게 마련이다.
 
배우려 하지 않는 아이들
아이들의 애착 양식의 전환은 교육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교사들은 문화와 사회가 낳은 강한 어른지향성의 덕을 볼 수 있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괴테는 동전을 지갑에 넣는 것처럼 지식을 마음에 집어넣을 수는 없다고 했다. 한 학생의 학습능력은 배움과 이해에 대한 욕구,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 영향 받고 교정 받는 일에 대한 개방성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의 산물이다. 또한 교사와의 결합,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 기꺼이 도움을 부탁하는 마음, 기대에 부합하고 성취하려는 열망, 특히 일에 대한 성향이 작용한다. 이런 모든 요소들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애착의 영향을 받는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아이의 학습능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질엔 네 가지가 있다. 타고난 호기심, 통합적인 마음, 교정을 통해 유익함을 얻는 능력, 교사와의 관계이다. 건강한 애착은 이 네 가지 자질을 향상시키지만 또래지향성은 이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아이를 배움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보다 세계에 대한 열린 호기심이다. 아이는 답을 얻기 전까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진리를 발견하기 전까지 탐구해야 하고, 확실한 결론을 얻기 전까지 실험해야 한다. 하지만 호기심은 타고난 성격의 일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창발적 과정의 소산이다. 바꿔 말하면, 아이가 애착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분리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발달의 부산물이라는 뜻이다.
자못 창발적인 아이들은 남달리 관심을 두는 분야가 있고 본질적으로 배움에 대한 동기가 강하다. 통찰을 획득하거나 세상 이치를 이해하는 데서 큰 만족을 얻는다. 그들은 배움에 대해 자기만의 목표를 만든다. 독창적인 것을 좋아하고 극기를 추구한다. 창발적인 학생들은 책임지는 일을 즐거워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는다.
 
또래지향성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것을 방해한다.
실패는 배움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고, 교정은 가르침의 주요 도구이다. 또래지향성이 야기하는 취약성으로부터의 도피는 이 주요한 배움의 길에 세가지 파괴적인 타격을 날린다.
첫 번재 타격은 우선 시도 부분에 가해진다. 새로움에 대한 시도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크게 소리 내어 읽기, 의견 제시하기, 낯선 영역에 들어서기, 생각으로 실험하기가 모두 그렇다. 그런 실험은 실수, 예측 불가능한 반응, 부정적인 응답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지뢰밭이다.
두 번째 타격은 실수에서 배우는 능력에 가해지낟. 실수에서 배우려면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식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잘못을 통해 발전하려면 책임을 져야 하고, 도움, 조언, 정정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대개 취약성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어서, 실수를 인정하거나 실패에 책임을 지지 못한다. 시험 점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낮으면, 실패를 다른 무엇(혹은 누구)의 탓으로 돌린다. 취약성에 대해 방어적인 아이들의 뇌는,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모든 일(이런 경우 실수와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는 일)을 무시하게 만든다.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에 가하는 세 번째 타격은 아이가 취약성에 대해 너무 방어적이면 행위의 부질없음이 뇌에 새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뇌가 이해하려면 좌절감이 부질없음의 느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부질없음을 뇌리에 새기는 것은 순응적 배움의 정수이다. 우리의 감정이 너무 굳어서 성공하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한 슬픔이나 실망감을 용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게 아니라 좌절감을 분출하는 반응만 하게 된다.
 
실제로 아이들은 또래에게서 가장 잘 배운다. 또래들이 어른들보다 모방하기 쉽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그만큼 또래지향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또래들과 같아지고 모방하는 방법뿐이다.
또한 또래지향성은 교사로부터 더욱 독립적인 학생들은 만드는데, 과로에 지친 수많은 교육자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불행히도 학생들은 발전적인 전진을 하지 못한다.
 
 
4. 아이들의 손을 놓지 마라
 
한창 성장해야 할 아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친구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거은 긑까지 손을 놓지 않을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 조부모, 교사들이다.
이런 어른들에게 애착을 단단히 형성한 아이일수록 취약성에 휘둘리지 않고 또래들과 제대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또래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아이, 친구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아이가 역설적으로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
 
1. 아이의 얼굴 또는 공간을 우호적으로 들여다보라.
아이들이 갈수록,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에만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런 경향은 활발한 걸음마 단계에서 시작되는데, 이때 부모는 부쩍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는데 신경 쓰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단계가 시작되는 바로 그 무렵, 엄마 행동의 90%는 애정, 놀이, 보살핌으로 이루어지고, 5%만이 아이의 행동을 막는 데 할애된다. 그런데 이러지는 몇 달 동안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진다. 걸음마를 하는 아이의 호기심과 충동으로 인해 부모가 억제해야만 하는 수많은 상황들이 발생한다. 이것은 아이를 정서적으로 품안으로 모으는 게 아니라, 교정하거나 지시하는 것이다. 이 시기쯤 우리는 우리 품안으로 모으는 본능을 잠재운다. 같은 방식으로 어른의 구애 행동도 과게가 일단 공공연해지면 사라진다.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어른과의 애착에서도 이런 소홀함은 잘못이지만, 아이들에게 이것은 파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부모로서 반드시 아이들의 안전과 안녕을 도모해야 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끄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계속 바라봄으로써 우리와의 관계 안에 아이들이 게속 머물도록 유인해야 한다.
 
2. 아이가 붙들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라
아이들의 애착 본능을 발휘하게 하려면, 아이들이 붙들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아들일 경우 손바닥에 손가락을 갖다 대보는 행위가 그것이다. 아이의 애착뇌가 수용하려 한다면, 아이는 그 손가락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애착 반사로 이 단순한 손가락을 잡는 행동은 순전히 무의식적인 상호작용으로, 애착 본능을 사전 준비시키고 아이가 꼭 붙들게끔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매우 불안정한 아이가 소모적으로 부모 시간과 관심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모는 휴식을 갈망하게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아이의 요구에 따라 기울인 관심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부모가 요구에 응답할 뿐이지 자발적으로 자신을 아이에게 주지는 않는다는 불확실성을 남긴다. 밑에 깔린 정서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은 채 아이의 요구만 증가할 뿐이다. 해결책은 아이가 요구하지 않는 바로 그 때 접촉을 꾀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이의 요구에 응답할 때 부모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아이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표현한다.
아이의 허를 찌르며 아이가 초청받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아이의 자아상이, 성취나 고분고분한 행동을 통해 얼마나 잘했는가, 혹은 얼마나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우리의 인정을 받는 일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진정한 자존감의 토대는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부모가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잇음에 대한 아이의 느낌에 있다.
 
3. 의존을 끌어내라
아기의 의존을 끌어내는 것은 사실상, "자, 내가 안아줄게." "내가 너의 다리가 되어줄게." "나한테 기대도 돼." "내가 안전하게 지켜줄게."라고 말하는 것이다. 좀 더 자란 아이를 우리에게 의존하게 하려면 우리를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고, 보살핌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면 된다. 아이는 우리에게 보조를 구하고 우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잇다. 우리는 아이에게 늘 옆에 있을 것이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괜찮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아이의 신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의미가 없다.
 
유아에게서 의존을 이끌어내는 일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단계만 지나면, 독립이 우리의 주요 과제가 된다. 그것이 아이들이 혼자 옷을 입는 일이든, 혼자 밥을 먹는 일이든, 혼자 쉬는 것이든, 혼자 재미있게 노는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든, 자기 문제를 스스로 푸는 일이든 전말은 똑같다. 우리는 독립을 옹호한다. 또 우리가 믿는 것은 독립이다. 우린 의존을 끌어내는 것이 발달이 아닌 퇴행을 끌어내는 일이라며, 약간의 의존을 허락하면 끝도 없을 거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통해 우리가 장려하는 것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우리로부터의 독립일뿐이다. 의존은 또래 집단에게로 옮겨간다. 우리는 아이들이 쉴 수 있게 이끌기보다는 서둘러 몰고 가면서, 수많은 자잘한 방식들로 어서 자라라고 밀어낸다. 우리는 어른들로서 의존을 거부하면서 서로에게 구애할 수는 없다. "당신 혼자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나한테 도움을 기대하지 마."라는 뜻을 전달한다면 구애를 할 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관계가 굳건해질 리 없다. 구애를 할 때, 우리는 "자, 내가 도와줄게." "그건 내가 해줄게." "기꺼이 내가 할게." "당신의 문제는 곧 내 문제야."라는 자세가 완비되어 있다. 어른들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정말 다른 누군가에게 기댈 필요가 있는 아이들의 의존을 끌어내서는 왜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아이들의 성숙에 대해 너무 많은 책임을 지려 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독립은 성숙의 열매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의존 욕구를 보살피는 일이다. 진정한 의존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을 잘해냈을 때, 자연은 성숙을 촉진시키는 맡은 바 임무를 마음껏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이들의 키를 늘릴 필요가 없다. 그저 음식을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 성장, 발달, 성수기 자연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깜박함으로써, 우리는 통찰력을 잃었다. 아이들이 밀어내지 않으면 절대 둥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은 이런 점에서 새들과는 다르다. 아이들은 밀어낼수록 더 바짝 매달린다. 또는 매달리는 일에 실패했을 때, 아이들은 다른 누군가와 둥지를 짓는다.
 
의존을 거부함으로써 독립을 얻을 수는 없다. 의존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진정한 독립의 추구가 시작된다. 준비도 되기 전에 분리를 혼자서 감당하라고 아이들을 내몰면, 아이는 급작스런 공포를 보이고 오히려 더 달라붙는다. 부모와 억지로 분리된 아이들은 부모의 자리에 대체물을 앉힌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의존의 이동을 독립과 혼동한다. 그런 거짓 독립(혹은 아이들이 아직 독립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립)을 부추김으로써 우리는 또래지향성을 방조하고 선동한다.
 
진정한 독립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독립에 이르려면 의존적인 상태를 거쳐야만 한다. 아이들을 독립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일이 아니라는(그것은 자연의 소관이다) 확신에 근거하면, 아이들의 의존을 끌어내는 우리의 맡은 바 일에 마음 놓고 전념할 수 있다.
 
4. 부모와 아이 사이를 되돌리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들이 아니다.
미성숙한 인간에게 우정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배려심 없이 우리를 대하거나, 우리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거나, 우리를 개인으로서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는 그것이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개의치 않고 우리의 발달과 성장을 지지한다. 이런 개념의 우정은 상호 존중과 개성이라는 굳건한 바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성숙에 도달하고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이 가능하게 되기 전까지 인간에게 진정한 우정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런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기대해도 될까.
결국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 아이들에게 친구는 필요하지 않다. 단지 애착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애착은, 가족과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과의 애착이다. 아이들끼리의 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어른들과의 관계를 일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발달적으로 볼 때 아이들은 또래들과의 관계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훨씬 더 필요로 한다. 즉 자기감각과 내적 경험의 분리가 나타나야 한다. 사람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해야 하고, 이런 능력 역시 성숙의 산물이다.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과 동행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고, 자기 자신에게 동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불안할 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려 한다. 혹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게임과 같은 오락 기기들에 집착하게 된다. 또래지향적인 관계는 TV 시청과 너무나 유사하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발달시키지 못하게 방해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확립했음이 분명히 드러나기 전까지,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발달시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럴 때는 친구를 사귀게 하는 것보다 보살피는 어른들과의 상호작용이나, 혼자 하는 창의적인 놀이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훨씬 낫다.
 
자존감의 궁극적인 핵심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독립해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다. 자존감에서 가장 힘든 과제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에조차 자기 자신의 존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믿지 않을 때, 스스로 자신을 믿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비판할 때,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자존감은 성숙함의 소산이다. 실제로 건강한 자존감의 핵심은 분리된 개인으로서의 생존능력에 대한 감각이다. 아이가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쳤을 때, 스스로 일어섰을 때, 혼자서 무언가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아이의 내부에 우뚝 솟은 자부심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의 진짜 쟁점은 유효성에 대한 결론과 자신의 존재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자존감은, 책임감 있는 어른들과의 따뜻하고 애정이 가득한 관계에서만 배양되는 정신적 성숙을 필요로 한다.
또래지향적인 아이들은 성장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스스로 독립하는 감각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자존감은 조건적이고, 다른 사람의 호의에 따라 부수적으로 생기는 자존감이다. 이것은 자존감의 척도가 아니다. 진정한 자존감은 난 이런저런, 혹은 다른 것을 할 수 있으니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저런 혹은 다른 것들을 할 수 있건 없건 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독립적인 자존감의 공백을 긍정과 지위, 성취와 같은 대체물로 채우려는 노력은 무익하다. 아무리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고 해도, 남는 것은 없다.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칭찬에 대해 더 굶주리게 된다.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더 많은 인기를 구하게 된다. 경쟁에서 아무리 이겨도 더욱 경쟁적인 사람이 될 뿐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생가하고 느낄 때 인기, 외모, 성적, 혹은 성취에 의존하는 방식을 그만두게끔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것들로부터 독립적인 자존감만이 진정으로 아이에게 힘이 된다. 어른들이 줄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수용만이, 타인들의 애호와 소속감의 신호에 집착하는 아이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수 있다.
 
건강한 발달을 위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놀이'가 아닌 '창의적 놀이'이다. 창의적 놀이(혹은 창의적 고독)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에게 애착을 형성한 어른과의 친밀감과 접촉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안정적이어야 한다. 그런 안정감이 아이로 하여금 상상력이나 창의성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 모험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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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엘리사벳  | 01/23 15:48
유익하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 제게 많은 도움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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