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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먼드 투투대주교

작성일 : 2018-09-07       클릭 : 341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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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해 싸운 화해와 평화의 사도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⑤] 데즈먼드 투투 - 아파르트헤이트·투쟁·대주교·진실과 화해
  • 이재근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8.08.28 13:22

20세기 세계 기독교는 다채롭고 화려하다. 저명한 예일대 교회사학자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1)는 19세기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칭했다. 라투레트는 이전과는 달리, 복음이 전 세계에 편만하게 퍼진 첫 위대한 세기라는 의미에서 19세기를 위대하다고 칭했지만, 실제로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태평양 도서島嶼에는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 기독교는 여전히 서양 중심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대한 세기'는 전 세계 구석구석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고, 실제로 하반기에는 그 무게중심이 서양이 아니라 비서양 지역이 되는 20세기다.2) 따라서 20세기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세계' 기독교라 칭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화려하고 다채로웠다.

그러나 그 다채로움은 확장과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과시되는 성공 스토리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기독교는 핍박, 차별, 전쟁, 압제, 학살이라는 암울한 단어들로 대표되는 비극과 실패의 역사이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래 2000년 역사를 오롯이 지닌 아르메니아 기독교는 1910년대 이래 터키와 소련의 압제하에 말살과 유배를 당해야 했다. 서양 선교사들의 희망이었던 중국과 북한의 기독교는 무신론적 공산 독재 정권의 등장과 함께 현장과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뿌리 뽑혔다. 모든 서양 기독교인 중 가장 냉정하고 합리적이라고 인정받던 독일 기독교인은 유대인과 집시, 소수자를 대량 학살하는 나치 정권에 충성스럽게 부역한 이들로 변모했다. 세속화한 북부와 유럽을 대신하여 순전한 신앙을 보수한다는 자기 확신에 충실했던 미국 남부와 남아프리카의 기독교인은 인종차별을 성경과 문화와 법으로 정당화하면서, 20세기라는 시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가장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기독교를 제도화했다.

남아프리카는 이런 백인 우월주의 아파르트헤이트 기독교와 이에 대한 흑인 대중 및 기독교인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20세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두우면서도, 다른 한편 가장 찬란한 역설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역사의 중심에 선 위대한 기독교 운동가이자 지도자 중 하나가 바로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Desmond Mpilo Tutu, 1931~)였다. 투투의 생애는 20세기 남아프리카 역사의 중심축이라 할 만한 '아파르트헤이트'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므로, 우선 아파르트헤이트와 남아프리카 기독교와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3)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자선 단체 클린턴글로벌이니셔티브 2007년 행사 현장에서 발언하는 모습. 사진 출처 플리커

 

 

1.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진 남아프리카 기독교의 지형도를 형성한 큰 물줄기는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주로 네덜란드인 개척자들로 구성된 개혁교회가 300여 년 전에 정착하면서 형성한 아프리카너(Afrikaners) 기독교로, 칼뱅주의적이며, 보수적이고, 무엇보다도 아파르트헤이트로 대변되는 인종차별주의를 구현한 기독교였다. 둘째는 원주민 토착 흑인들이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 전수된 기독교를 토착화한 흑인 기독교다. 이들 흑인 기독교인 중에는 활동한 선교사가 이식한 유럽의 전통적인 기독교 교단에 속한 이들도 있고, 백인 선교사에게서 독립된 교파나 개교회로 현지인이 창설한 집단에 속한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규모와 구성원 수는 비교적 작고 적지만, 흑인 기독교인에게 아프리카너 백인 기독교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신학적·정치적 논리와 힘을 제공한 영국계 기독교, 특히 성공회가 있다.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아프리카너가 사용하는 언어인 아프리칸스(Afrikaans) 단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분리된 상태'(separateness)를 뜻한다. 1948년에 아프리카너가 주도하는 남아프리카 국민당(National Party)이 도입한 이 사회체제는 백인우월주의 정치 및 종교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인종 분리 정책이 남아프리카 전역과 생활문화 전체로 확장 적용되었다. 이런 구별이 낳은 불평등과 차별이 심해지고, 이에 따른 저항도 강해지자, 반대급부로 정부도 무력과 법으로 저항을 강제 진압하는 강도가 세졌다. 따라서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차별, 압제, 독재 등은 이 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에나, 이것이 종결된 1994년 이후에나 거의 동의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에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엔진으로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약 300년 전에 백인이 이 지역에 도착한 이후 흑인의 땅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이미 내면화된 인종주의를 제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네덜란드인이 남아프리카 지역에 1652년에 도착하면서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는 구별되는 개신교 '개혁파/칼뱅주의'(Reformed/Calvinist) 문화를 이식했다. 이어서 영국인이 1805년에 케이프를 장악하면서 영어권 식민지들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유럽 식민지 문화가 약 150년 동안 남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리면서, 원래의 반투 흑인 문화와 어우러져, 독특한 내적 역동성과 긴장을 만들어 냈다.

19세기 초에 남아프리카에 온 영국인 식민지 당국은 당시 모국에서 불던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해방 운동 열풍에 발맞추어 남아프리카 식민지 내에 노예해방을 비롯한 여러 개혁을 도입했다. 이를 피해 '농부'라는 의미의 네덜란드 '보어인'(Boers)은 내륙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도르트 신조를 따르는 칼뱅주의자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여정을 이집트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라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다. 따라서 영국은 이집트, 영국 왕은 파라오, 가나안 정착을 막는 여러 흑인 부족은 가나안 족속과 마찬가지로 진멸해야 하는 부족이었고, 그들의 땅은 취해야 할 약속의 땅이라 믿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파 신학의 독특한 유산인 언약신학을 오용하여, 흑인 부족의 진멸과 땅 정복을 하늘이 부여한 거룩한 소명이자 언약의 성취로 정당화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이어서 보어인이 차지한 내지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다량으로 발견되자, 이를 탐낸 영국과 보어인 간에 전쟁(보어전쟁, 1899~1902)이 터졌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대영제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네덜란드계 보어인은 경제와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물론 이들의 패배 및 배제 상황은 당시 흑인이 처한 절대적 빈곤과 차별, 고난 등의 극단적 현실에 비하면 훨씬 온건하고 상대적인 주변부 경험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 번성하기 시작한 백인종 및 아프리카너 민족 정체성 이데올로기가 자라나기에 충분히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닥친 경제 위기도 문화 저항 및 정치권력 신학화라는 독특한 유산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 지도자 다수가 독일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했는데, 이때 이 중 다수가 독일 나치즘을 탄생하게 한 인종적 순수성과 신적 소명이라는 비전을 남아프리카식으로 내면화했다. 아프리칸스어는 구별된 언어로, 국민당은 네덜란드계 민족과 백인종의 정치적 대변자로, 기독교 민족주의는 이상화된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남아프리카 개혁교회가 성경에서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 분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시도는 18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본문으로 보았다. 즉, 흩어짐을 면하고자 인류를 하나 되게 하려 했던 인간의 시도를 하나님은 벌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인종별로, 민족별로, 언어별로 흩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각 인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창조질서라는 논리였다. 자신들을 유대인과 영적으로 동일시했으므로, 유대인이 이교도이자 다른 인종인 가나안 사람과 뒤섞이지 않고 순전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경의 명령도 문자 그대로 보어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세상에 죄를 들어오게 한 여성(창 3:16)과 노아가 저주한 아들 함과 손자 가나안의 후손으로서의 흑인(창 9:18-27)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의 '저주' 본문들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데 자주 활용된 해석이었다.4)

아파르트헤이트 이전의 백인 개혁교회 안에 이미 인종 구별과 차별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논리도 남아프리카 기독교의 다른 진영 안에 이미 존재했다. 성경, 아프리카 문화, 토착 아프리카인의 독립 지도력 등이 결합하여 20세기 초에 탄생한 아프리카 시원/독립/기원교회(African Initiated/Independent/Instituted Churches, AICs)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대응하는 신학적·문화적 논리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대개 직접적인 정치 활동이나 물리적 시위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식민주의 및 뒤이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는 문화 및 신앙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이들 흑인 지도자들이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신학적·문화적 논리를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주로 영국인 선교사가 이끌던 교회와 미션스쿨에 다니며 배운 교육, 그리고 독서 및 유학 등을 통해 다양한 영국계 기독교의 사회참여 전통을 접한 것이었다. 1910년에 탄생한 첫 흑인 조직인 남아프리카연합(Union of South Africa)은 흑인이 국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912년에 탄생한 (그리고 1994년부터 2018년 현재까지 남아프리카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가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 시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 일부가 이들을 지지하고 함께 연대하면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 이슈를 두고, 백인 개혁파 아프리카너교회 대(vs) 흑인 교회 및 백인 영어권 교회라는 구도가 명확해졌다.

1948년에 국민당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흑인 및 영어권 교회의 저항은 미미했다. 아직 힘을 규합하지도 못했고, 합의된 해석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통일된 견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의 계기는 1960년에 찾아왔다. 경찰이 통행 제한에 저항하는 흑인 시위자 69명을 살해한 샤프빌 학살 사건(Sharpeville massacre)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전 세계가 남아프리카 아프리카너 정권의 잔혹성을 알게 되면서, 이후 국제 정치계와 종교계 등이 남아프리카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그해 12월에 요하네스버그에서 소집한 코테슬로 회의(Cottesloe Consultation)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공식 반대 성명서가 채택되었다. 아프리카너 정권의 기반인 네덜란드개혁교회(DRC)가 성명서를 '신학적으로 너무 자유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등, 수구적 반응을 보이자 이 교단 중진 중 하나이자 대회 참석자였던 베이어스 노드(Beyers Naudé, 1915~2004)5)가 1963년에 크리스천인스티튜트(Christian Institute, CI)를 설립했다. CI는 인종 간 대화, 연구, 출판을 통해 화해를 촉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DRC 교단이 이 기관과 교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자, 결국 노드는 CI를 선택했고, 이로써 목사직도 면직당했다.6) 1977년까지 존속하다가 정부가 해체시킨 CI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기독교인의 두 저항 방식을 탄생하게 한 모체였다.

 

전 세계에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함을 알린 계기가 된 샤프빌 학살 사건. 사진 출처 플리커

 

아파르트헤이트가 철저하게 백인 아프리칸스 개혁교회의 세계관이 만들어 낸 체제였으므로, 기독교인 저항자들의 저항 방식 중 첫 번째는 이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신학'을 무기로 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노드의 CI와 1968년에 창설된 남아프리카교회협의회(South African Council of Churches, SACC)가 공동으로 '남아프리카 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 Message to the People of South Africa'라는 문건7)을 발표한 것이 의미 있는 첫 저항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기독교인 간에도 인종 화해와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거짓 복음이며, 성경 및 십자가와 부활에서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사역을 부인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 성명서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 첫 저항 방식은 1970년대에 카를 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 등 반나치 '바르멘 선언 Barmen Declaration'(1934)에 관여한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데즈먼드 투투, 알란 부삭, 존 드 그루시 등 저명한 남아프리카 신학자들이 펼친 활동과 저술8)로 확산되었다. 이어 1982년에 부삭이 지도력을 크게 발휘한 세계개혁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 WARC)이 '아파르트헤이트는 죄이며, 이를 신학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선언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개혁교회가 WARC 회원 교단이었기에 이 선언은 치명적이었다. 1881년에 백인 네덜란드개혁교회에서 분리된 '유색인종'(Coloured) 교단인 네덜란드개혁선교교회(DRMC)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며 화해와 연합, 정의를 외친 '벨하 신앙고백 Belhar Confession'(1982)9)을 1986년에 공식 채택했다.

CI에서 파생된 두 번째 궤적은 주로 '기독교 정치윤리학'의 발전을 따라 움직였다. 미국 흑인신학 및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과 유사한 남아프리카 흑인신학의 등장도 이 움직임의 일부였다. 이 운동의 절정은 1985년에 주로 요하네스버그 근교 소웨토 흑인 구역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흑인 신학자들이 탄생시킨 '카이로스 문서 Kairos Document'10)였다. 이 문서는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막바지에 진보적 기독교인이 연대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치와 교회 및 경건 중심 신학에 저항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연 도구가 되었다.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이어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이런 식으로 남아프리카 모든 국민의 삶을 지배한 실재였다. 데즈먼드 투투는 이 체제가 힘을 발휘한 시기에는 이를 무너뜨리는 저항 운동 과정에서, 체제 붕괴 이후에는 화해와 공존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정의 중심에 서서 지도력을 발휘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흑인 인권 투사, 성공회 사제, 노벨평화상 수상자, 진실과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서의 투투의 삶은 씨실과 날실이 교차되면서 촘촘하게 짜인 직물과도 같으므로, 각각을 따로 분리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제 시간 순서를 따라 투사에서 평화의 사도로 변해 가는 투투의 삶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고자 한다.11)

 

1986년 요하네스버그 알렉산더타운십(흑인 집단 거주지)에서 거주민들에게 연설하는 투투. 사진 출처 미국공로아카데미

 

 

2. 투쟁, 대주교, 진실과 화해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대주교'(Archbishop)라는 직함에서 유래한 '아치'(Arch)라는 애칭으로 남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는 1931년 10월 7일에 웨스턴트란스발(Western Transvaal, 오늘날의 North West Province)에 속한 소읍 클레르크스도르프(Klerksdorp)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재커라이아(Zachariah)는 미션계 학교에서 교육받은 후 클레르크스도르프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했고, 어머니 알레사 마틀헤어(Aletha Matlhare)는 가정부였다. 이들 부부는 평생 네 자녀를 낳았는데, 딸 셋, 아들 하나였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이 시기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공식 시행된 1948년 이전이었으나, 그전부터 인종 분리와 차별은 편만했다.

투투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벤터르스도르프(Ventersdorp)에 세워진 아프리카인, 인도인, 컬러드(Coloured, 유색인종 및 혼혈)를 위한 학교로 옮겨 갔는데, 투투 역시 아버지 학교 학생이 되었다. 백인을 제외한 모든 인종이 모인 학교였으므로, 투투가 처음으로 경험한 일종의 '무지개' 공동체였을 것이다. 누이 실비아의 인도로 전 가족이 이 시기에 아프리카감리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다녔다. 투투도 이때 세례를 받았다. 그러다 1943년에 전 가족이 성공회로 옮기면서, 이후 투투가 명성을 얻고 영향력을 떨치는 소속 교단이 결정되었다.

아프리카너 요하네스 펜터르(Johannes Venter)가 소유한 땅에 1866년에 도시로 건설된 펜터르스도르프는 극우 인종주의 백인 정치 단체가 활발히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후에 투투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경험한 인종차별과 흑인 전반이 당한 고통을 담담히 기술한다.

'우리는 요하네스버그 서쪽에 있는 조그만 동네 벤터스도르프에 살았는데, 나중에 그곳은 신나치주의 '아프리카너저항운동'(AWB)의 본부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흑인 거주지에 살던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신문을 사기 위해 백인 동네로 가곤 했다. 거기서 흑인 아이들이 백인 학교 쓰레기통을 뒤져 백인 학생들이 내버린 멀쩡한 사과와 샌드위치를 꺼내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백인 학생들은 정부에서 제공하는 무료 급식보다 엄마가 싸 준 점심 도시락을 더 좋아했다. 도시락을 싸 올 여유가 있는 백인 학생들에게만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상황은 인종차별이 낳은 왜곡된 현실의 일부였다. 정작 제대로 된 음식이 절대적으로 아쉽고 도시락을 싸 올 여유조차 없는 흑인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들에게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하인으로서 일손이 필요할 때 외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땅에서 보이지도 않는 존재였다. 어린 나도 그런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길 줄 진작부터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12)

이후 투투의 아버지는 요하네스버스 근교 웨스턴트란스발의 루데푸르트(Roodepoort)로 이동했다. 투투 가족은 판잣집에 살만큼 가난했기에, 어머니가 에젠젤레니시각장애인학교(Ezenzeleni School of the Blind)에서 일하며 생계에도 도움을 주어야 했다. 1943년에는 크루거르스도르프(Krugersdorp)의 흑인 정착지 문시빌(Munsieville)로 다시 이사해야 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세탁으로 생계를 꾸렸기에, 어린 투투가 백인 가정을 오가며 옷을 배달하곤 했다. 여분의 돈을 벌기 위해 먼 농장에 가서 오렌지를 산 후 동네에 와서 되팔거나, 기차역에서 땅콩을 팔고, 골프장 캐디로 일한 것도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한 투투의 어린 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이었다.

1945년부터 투투는 소피아타운 근교 오래된 웨스턴원주민구역(Western Native Township)에서 공립학교인 웨스턴고등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에 1년간 결핵으로 요양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성공회 트레버 허들스턴(Trevor Huddleston, 1913~1998) 신부와 만나게 된 투투는 신부의 책을 빌려 읽으며 깊은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후에 투투는 허들스턴의 교구에서 복사(server)로 신부를 도왔다. 허들스턴 신부 이외에도 마크헤네 목사(Pastor Makhene), 투투를 성공회 신자로 이끈 세크가파네 신부(Father Sekgaphane), 펜터르스도르프의 아서 블랙솔 목사(Reverend Arthur Blaxall)와 목사 부인 등이 청소년 시절에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종교인이었다.

병으로 학사에 뒤처졌지만, 교장의 배려 덕에 대학입학시험반(Matriculation class)에 조기 합류한 투투는 1950년 말에 촛불 아래 공부하며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의사가 되고 싶어서 비트바테르스란트의과대학(Witwatersrand Medical School)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아버지를 따라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로써 투투는 1951년에 프리토리아 외곽의 반투사범대학(Bantu Normal College)에 입학해서 1954년에 학위를 받은 후, 모교 크루거르스도르프의 마디파네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5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대학(UNISA)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도운 인물 중에는 로버트 망갈리소 소부크웨(Robert Mangaliso Sobukwe)가 있었는데, 그는 1959년에 결성된 남아프리카 흑인 정치조직인 범아프리카니스트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의 초대 의장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뛰어났던 노말리조 레아 셴샤네(Nomalizo Leah Shenxane)가 투투의 아내가 되었는데, 결혼식은 1955년 7월 2일에 있었다. 결혼 후 투투는 아버지가 여전히 교장으로 일하고 있던 문시빌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1948년에 제도화한 정부가 투투의 결혼 2년 전인 1953년 3월 31일에 반투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흑인 교육에 도입한 일이 있었다. 흑인이 초등학교 수준까지만 교육을 받도록 제한하는 법이었다. 투투는 이 노골적인 인종차별법 이후에도 3년간 더 중학교 수준을 담당하는 교사로 가르치다가, 정부의 흑인 교육 제한에 반대하며 교사직에서 사임했다. 아마도 이 행동이 투투가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첫 공식 사례일 것이다.

 

2014년 5월 7일 남아공 총선을 맞아 투표소를 찾은 아내 레아와 데즈먼드 투투. 사진 출처 데즈먼드·레아투투레거시재단

 

문시빌고등학교 재직 중에 투투는 성직자가 되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요하네스버그 주교의 감독 아래서 사제 훈련을 받기로 했다. 1955년에 크루거르스도르프의 차부제(sub-Deacon)가 된 후, 1958년에는 부활공동체신부회(Fathers of the Community of the Resurrection)가 운영하는 로제튼빌(Rosettenville) 소재 세인트피터스신학대학(St Peter's Theological College)에 등록했다. 학업에 두각을 나타낸 투투는 우등상 두 개를 받으며 신학 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12월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세인트메리대성당에서 부제(deacon)로 안수받고, 베노니(Benoni)의 세인트올번스교회(St Albans Church)에서 처음으로 보좌신부가 되었다. 1961년 말에 사제(priest)로 안수받은 후에는 토코자(Thokoza)에 새로 세워진 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까지 투투 부부는 세 자녀의 부모였다.

신학 공부를 더 할 계획을 세운 투투는 1962년 9월 14일에 잉글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투투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이 두 기관은 투투가 나중에 성공회 사제이자 주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할 때도 정치적·심리적·물질적으로 그를 지원한 우군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서 질식할 것만 같은 삶을 살던 투투 가족에게 런던은 기운을 북돋는 생활 현장이었다.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런던에서 투투 가족이 처음으로 아파르트헤이트와 통행법에서 해방된 자유를 경험한 사건은 일평생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이들에게 남긴 것 같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잉글랜드에도 인종차별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노출되지는 않았다.'13) 특히 그는 나라에 언론의자유가 있다는 사실, 특히 하이드파크 한구석에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가 있어서 원하는 이는 누구든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14) 이 경험의 가치는 남아프리카로 돌아간 후 투투 가족이 겪은 완전히 대비되는 상황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가족과 남아공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중략) 우리의 목적지는 이스턴케이프주의 앨리스였다. 나는 그곳의 연방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새집에 들일 가구를 사러 이스트런던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다는 걸 알고 있던 우리는 생선과 감자튀김을 사 들고 도로에 주차해 놓은 차 안에 앉았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즐기던 우리였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스트런던의 해변으로 소풍을 가곤 했는데, 해변의 흑인 전용 구역은 바위가 많고 가장 볼품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소형 기차가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막내가 '아빠, 그네 타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힘없이 '안 된다, 아가야, 넌 가면 안 돼'라고 대답해야 했다. (중략) 그런 순간마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고, 내가 너무도 처참하고 수치스럽고 한없이 작게 느껴져서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 아버지가 어린 아들 앞에서 느꼈을 수치심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15)

 

데즈먼드 투투가 보좌신부로 사역을 시작한 세인트올번스교회.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킹스칼리지를 우등을 졸업한 투투는 당시 대학 명예총장이던 모후(Queen Mother, 엘리자베스 II세의 어머니)에게서 학위를 받았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넷째 아이도 1963년에 태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심지어 백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기까지 했다. 런던 골더스그린(Golders Green)의 한 교회였는데, 여기서 3년간 사역한 후 서리(Surrey)로 전출되었다. 스텁스 신부(Father Stubbs)의 권유로 투투는 대학원 과정에도 등록해서 이슬람 관련 연구에 집중했고, 논문상도 받았으며, 1966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남아프리카로 귀국한 투투는 이스턴케이프 앨리스(Alice) 소재 연방신학교(Feder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쳤다. 신학교 교수직 외에, 그는 포트헤어대학(University of Fort Hare) 성공회 교목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 투투는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가장 화려한 학력과 실력을 가진 흑인 성공회 성직자였다. 1968년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잡지에 이민 노동자 신학을 주제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인종차별 문제로 교사직을 사임하는 기개를 보여 주었던 1956년 당시의 투투 이후, 이제 글로 정책에 저항하는 저항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앨리스에서는 이슬람과 구약에 대한 관심사를 조합하여 박사 공부를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동시에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신학교 학생들이 인종차별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저항을 시작하자, 투투도 이 대의에 함께 투신했다. 1970년에 신학교 부학장이 된 투투가 미래에 이 학교 학장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심정으로 그는 레소토16)의 로마에 소재한 보츠와나·레소토·스와질랜드대학교 교수로 오라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흑인신학'(Black Theology)이 남아프리카에 소개되자, 투투도 이를 열렬히 수용했다. 원래 미국에서 차별받는 흑인을 위한 민권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의 사상과 운동에서 기원한 흑인신학은 제임스 콘(James Cone, 1936~2018)을 비롯한 다음 세대 흑인 신학자들의 저술 작업을 통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에서 이 신학이 탄생한 미국 남부 상황과 가장 유사한 토양을 가진 남아프리카에서 이 신학이 가장 빠르게 수용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17)

개발도상국 신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1960년에 창설된 신학교육기금(TEF)의 책임자대행 월터 카슨 박사(Dr. Walter Carson)가 1971년 8월에 투투에게 아프리카 부대표 최종 후보자 중 하나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투투 가족은 1972년 1월에 다시 잉글랜드로 가서 런던 남동부에 거처를 정하고, 교육기금의 국제책임자팀과 함께 사역했다. 약 6개월간 제3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동시에 브롬리 소재 세인트어거스틴교회의 명예보좌사제로 임명되어, 교회 사역도 지속했다. 이 시기에 서방에 거주하면서 대표적인 구제 및 구호 기금과 함께 일하며 얻은 경험과 네트워크는 투투가 이후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사로서 서방 정치 및 교계, 언론의 지원을 얻게 만든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74년에 요하네스버그 주교 레슬리 스트래들링(Leslie Stradling)이 은퇴하면서 후임자로 티모시 배빈(Timothy Bavin)이 주교로 선출되었다. 배빈이 투투에게 자기 대성당의 주임사제(dean)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투투는 1975년에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요하네스버그의 첫 번째 흑인 성공회 대성당 주임사제이자 요하네스버그 세인스메리대성당 교구사제(rector)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담당한 백인 교구민 일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그는 여기서 당시 정부에 급진적으로 맞서는 투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 사건이 중요한 사례였다. 먼저, 1976년 5월 6일에 그는 당시 수상 발타자르 요하네스 포르스터르(Balthazar Johannes Vorster)에게 공개편지를 써서, 아프리카너들이 어떻게 자유를 획득했는지 상기하고, 특히 통행법과 인종차별 등으로 흑인들이 자기 조국에서조차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3주 후 정부는 투투의 편지 동기가 정치적 선전, 선동이라 주장하는 답장을 투투에게 보냈다. 1976년 6월 16일에는 요하네스버그 근교 흑인 집단 거주지 소웨토(SOuth WEstern TOwnships의 줄임말) 출신 학생들이 수준 낮은 교육을 강요하는 정책과 교육 언어로 아프리칸스어(Afrikaans, 네덜란드어가 토착화한 남아프리카어로, 백인 아프리카너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정책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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