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바로 보십시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주님을 소개할 때 한 말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놀라운 능력으로 문제와 장벽을 일진광풍으로 없애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릅니다,
세상 죄를 한 몸에 지고 가는 메시야! 상상이 되시는 지요? 그 분이 세상 죄를 지는 모습을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의 언덕을 오르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미 주님과의 첫 만남에서 그 분에게서 세상 죄를 지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메시야의 표시로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12장의 유월절 사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파라오의 폭정은 마침내 애굽에 죽음을 불러 옵니다. 그러나 애굽 전역에 덮친 죽음의 방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죽음의 기운이 그 집을 통과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pass over! 유월절이란 말이죠.
이 개념은 레위기의 제사법의 근간으로 구약동안 성전에서 짐승의 피를 바치는 예식을 드리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고(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대신 피 흘려 죽어야 할 짐승 즉 소나 양, 염소나 비둘기 등이 필요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히브 9:22)
요한은 주님이 바로 하느님께서 마련한 세상의 죄값을 위해 대신 죽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선언입니다.
주님을 소개받은 제자들의 반응도 놀랍습니다. 우리라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 분을 향해 동정과 연민 또는 빈정거림과 야유나 조롱 아니면 외면을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주님을 따라 갑니다. 그리고 주님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를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 세상의 죄를 담당했던 그 사역을 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그동안 알아왔던 제자도나 크리스천 됨과 너무도 다른가요? “왜 하필 내가?” 하며 피하고 싶습니까? 교회가 그 짐을 회피하면 세상은 죄와 죽음으로 가득 차게 될 겁니다. 오늘의 세상이 바로 세상 짐을 외면하는 교회와 그 결과로 악과 죽음으로 질주하는 사회의 모습을 바로 보여 줍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첫 번 제자처럼 주님과 함께 머문다면 세상도 또 교회도 달라질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