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흙으로 빚어진 육체와 하느님의 숨이 합하여진 이중적 존재로, 배고픔과 목마름에는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공존하고 동시에 작동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못마땅해 합니다. 우리의 이중적 구조, 곧 본능적 욕구와 그와 반하는 본성의 갈망이 대립하고 갈등하기 때문에 바울처럼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 선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 악을 행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유혹을 받으셨지만, 넘어지지 않았다고 히브리기자는 고백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지식이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부는 바람, 들에 핀 꽃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 사람의 눈, 사람의 귀로 듣고 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음성과 사랑하심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관점으로 볼 때, 평범함 속에, 모든 것 속에서 신비와 놀라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꺼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 상처와 아픔을 먼저 꺼내야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줄 빵, 곧 예수의 생애는 수난과 죽음, 부활의 여정으로, 지는 게 이기는 것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뜨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생활을 도왔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2번씩이나 목숨을 살려주고, 용서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 안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사역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와 놀라움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위로부터 오는 빵, 곧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 양식을 먹었기에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길에서 길을 잃은 엘리야,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 곧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이었습니다.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 이사야43장에서 물속에서, 불속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되새김이요, 예수님처럼 하늘의 소리, 격려와 지지의 말씀이 구운 과자와 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퍼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하십니다.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라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바쳐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어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