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5년 5월 20일(수)
장소 : 약수동교회
강사 : 대전교구장 유낙준(모세) 주교
제목 :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시편 96:1)
새 노래로 주님께 노래하여라(시편96:1)
+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소서. 0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 성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 18- 25). ◎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20.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22.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23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성 요셉의 삶을 묵상합시다
1. “성령으로 태어난 이 아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인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라.”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성 요셉이십니다. 새로운 삶을 제시한 천사의 제안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요셉이었습니다. 뭔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절박함이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너무 캄캄해서 미래를 볼 수 없지만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회 신도로 신앙적 아버지로 성 요셉을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히 다가왔습니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가져오신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자." 요셉의 선택은 자신을 온전히 버림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가난과 인내와 순결을 지키신 의로운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버지이셨습니다.
성인 벨라디노의 고백이 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천국의 모든 성인 중에서 성모님 외에는 오직 성 요셉이 제일 높으십니다. 성 요셉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 품위와 덕행이 성모님 외에 다른 성인보다 뛰어나시니, 하늘에 계신 영광이 어찌 다른 성인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15~1582)는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깊었습니다. "나는 성 요셉을 나의 변호자이며 보호자로서 존경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 요셉께서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도와주시는 일을 나 자신의 체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성 요셉에게 언제나 순종하셨으므로 지금도 천국에서 성 요셉의 소원을 모두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전 세계를 성 요셉에 대한 신심으로 투입하고 싶습니다...."
또한 어떤 분은 "나는 제일 먼저 성 요셉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는 나의 하루 일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만큼 요셉 성인을 사랑하고 있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성 요셉은 성가정의 모든 것을 보살핀 것처럼 교회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우리 성공회 성도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니 자주 기도를 올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 기도합시다. (익명의 수도자가 쓴 성 요셉에게 드리는 기도)
성 요셉, 숨은 의인 성 요셉이여!
당신은 말없이, 보수를 기대함도 없이, 누가 알아주기를 바람도 없이
순수히 그저 당신을 내어 주셨으며, 숨어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
당신은 항상 남의 입장을 옹호해줄 줄 알았으며 남의 허물을 감싸줄 줄 알았고
자신의 포기와 양보로써 평화를 도모하는 길을 추구하셨습니다.
당신은 항상 깨어 주님 말씀에 귀 기울였고, 듣는 순간 자기 계획을 포기할 줄 알았으며,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데 과감하셨습니다.
주님 뜻 받드는 것이 당신 음식이 되고, 남을 위한 봉사가 당신 기도가 되었으며,
가족을 돌봄이 당신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을 위인이라 생각도 못 했으며,
더구나 당신 자신은 그저 종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하느님 앞에 더욱 보배로웠고
그런 겸손과 그런 의덕이 아들을 맡길 정도로 하느님 눈에 드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한 줄기의 빛도 한 점의 영광도 못 누렸어도
지금 하느님 동산에 우뚝 서 계시며 성인 중에서 혜성처럼 빛나고 계십니다.
존경하올 성 요셉이여! 당신은 수도자의 모범이시고 주님 찾는 자들의 지도자시니
아직 인생의 투쟁 중에 있는 우리를 이끄시어 당신의 숨은 길 걷게 하소서. 아멘.
+ 주여,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 우리 부르짖음이 주께 사무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은 지금 나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0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느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3:8)That evening they heard the Lord God walking in thr garden, and they hid from him among the trees.
자신이 미워질 때 하느님도 당연히 나를 미워하실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악을 묵과하거나 인정하시지 않지만, 우리 안에 악이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거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입니다. 자신의 문제로 인하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에 몰두하여 자기 힘으로 인생문제를 풀고자 할 때 하느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느님께 다가오지 않을 때, 저만큼에서 딴 일로 바쁠 때,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 크고 많은 것에만 쫓아다니는 우리를 보셨을 때 하느님은 비통해 하시고 슬퍼하시고 아파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곁에 있기 원하십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염려와 두려움으로 살지만 하느님만 바라볼 때는 변치않는 사랑 안에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내가 착할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망가지고 볼품없을 때인 연약할 때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막지 못합니다. 영적인 삶인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상한 자아를 받아들이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치와 자기혐오 때문에 얼어붙은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은 아파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이 캥기는 순간 그 즉시 우리는 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자기모습이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처럼 우리도 흉내내며 숨습니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에 대하여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 더 슬프게 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너 어디있느냐?”(창세기3:9) But the Lord God called out to the a man, "Where are you?" 하느님은 아담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숨지 말고 나오라 부르십니다. 토머스 머튼은 “하느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분 앞에 철저히 아무것도 아님을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에게로부터 나온 생명을 받은 우리를 존재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금 우리를 자기혐오에서 나와 그분의 진리 안으로 들어서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시편 51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참으로 힘들 때에 묵상하는 기도문입니다.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결점이 항상 눈앞을 아른거릴 때는 잠도 안 오게 됩니다. 그 때 자주 보는 기도문이 이 시편 51편입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십니다(시편51:17) My sacrifice is a humble spirit, O God; you will not reject a humble and repentant heart.”
내 결점을 수없이 감추려고 해도 내 스스로에게는 감출 수 가 없었습니다. 그 결점으로 인하여 내 스스로를 미워하고 내 스스로를 싫어할수록 하느님도 나를 미워하고 나를 싫어하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식이 강할수록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감추지 말자. 하느님 앞에서 나를 감출 수조차 없다. 나를 있는 그대로 내 결점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자.” 여기까지 가기까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때 받는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내 참된 향기를 내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기에 고러한 고통이 오면 너무 화를 내거나 좌절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 함께 살자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이 땅에서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해서 천국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자리하게 하려고 지금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빠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 내게 될 것입니다(1고린13:7).
자신의 취약한 점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게 하는 힘은 기도가 쌓일 때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의 흠을 이야기해도 나를 헤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 고백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니 제단에 우리가 올려놓는 제물은 우리의 삶 속에서 남에게 말못하는 베인 상처와 아픔과 슬픔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드러내 보인 우리의 그것들을 기쁨과 평화와 즐거움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는 여정일 때에는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십니다.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성령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16:7, 바우로와 실라) The Spirit of Jesus did not allow them.” 오른쪽으로 가면 곧바로 도착할 수 있는 비시디아지방이고 필립비로 가려면 왼쪽으로 배를 타고 항해를 해야 하는데 예수의 성령은 더 어려운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령이 가리키는 길은 세상적으로 어려운 길이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하느님께서 보는 시각으로는 그 길이 하느님을 더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크게 차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느님을 알게 되니까요.
“너는 안전한 자리에 있다” 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의 단점을 무척이나 숨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못난 기분, 밑바닥 수준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으로 인하여 영적 체험을 많이 하면서도 과거에 꼼짝없이 잡혀 사는 신앙인을 슬프도록 많이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성을 쌓는 물질우선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영혼을 위한 삶의 방식보다 더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위한 삶을 눈여겨보기 보다는 경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사니까, 우리가 사는 구조가 그렇게 인도하니까 라는 이유로 비인간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선택을 하는 우리시대의 군상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내면에까지 들어와 자신까지 착취하는 방식으로 살아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자신까지 착취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남에게 배려하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이 땅에 살면서도 이상한 나라의 사람으로 산다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에까지 자기 착취하는 방식으로 살도록 부추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름다운 곳인데 교인은 싫어져갑니다.
스웨덴의 위대한 성녀 브리짓타Brigitta(1302-1373); 십자가서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브리짓타가“오 주님, 누가 그랬습니까?”의 질문에 주님께서 “나를 멸시하고 내 사랑을 무시한 사람들이 그랬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는 과부로 남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