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힐러리(포아티에의 주교, 믿음의 스승, 서기 367년)
주석: 스코틀랜드에서 힐러리는 1월 14일에 기념된다.
힐러리는 서기 315년경 프랑스 중서부의 포아티에에 있는 한 이교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비록 이교도이긴 하였지만 그의 부모는 그를 훌륭한 문법학자들과 수사학자들로부터 고전 문학과 철학을 배우도록 하였으며, 결혼하여 '아브라' 라는 딸을 하나 두었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숙했다.
그 후 성서를 읽던 중 하느님에 관한 고상한 표현들과 이교도들의 신화에 드러나는 물질주의에서 차이점을 깨달아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서른의 나이에 트리에르의 주교 막시미누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힐러리는 유스티누스처럼 철학적이면서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기를 노력하던 중에 성서 안에서,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힐러리는 서기 350년 쁘와띠에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개종하기 전에 이미 결혼하였기 때문에 아내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친 아리아파에서 주관한 베지에르의 지방 종교회의에서 아리아파와 논쟁을 벌이던 중 정통파 아타나시오 주교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아리아파를 지지하고 있는 콘스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프리기아로 추방당했다. 그는 거기서 그리스 신학을 공부하고 서방 주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책을 쓰면서 대 신학자로 성장하였다.
힐러리의 작품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열두 권에 이르는 [삼위일체론]이다. 이 저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에서는 신앙에 관한 연구이고, 둘째 부분은 아리우스 이론과 주장, 그리고 아리우스가 사용한 성서구절에 대한 체계적인 논박이다.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드님은 영원하시며, 언제나 아드님이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시간이 있기도 전에 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람은 도덕적 선행을 이행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그분, 하느님을 비추고,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하나 되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음률을 붙인 찬미가를 활용하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서와 시편의 주해서를 만들었으며, 그의 제자이자 후에 투르(Tours)의 주교가 된 성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함께 갈리아 지방에서 수도원 제도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그는 36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851년 5월 13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의 배움과 웅변은 그에게 “서방의 아타나시오스” 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포아티에의 힐러리 저서 <삼위일체 논문>으로 부터
내가 처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 했을 때, 나는 부와 여가를 쫓는 것에 매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발견하듯 그것에는 커다란 만족감이 없었고, 인생을 욕망의 만족감과 시간 죽이기에 쓰는 것은 인류에게 가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재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 생을 받았다. 이것은 인생이 영원을 향해 있기 때문 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 이 고통스럽고, 불안 투성 이고, 공허한 마음으로 시작해 장황한 대화로 끝나는 삶을 어떻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의 천성으로 자극된 인간은, 좋은 삶은 좋은 행동과 좋은 생각을 할 때만 보장된다는 확신을 갖고, 가르침과 인내, 순결, 용서 등 선행의 연습을 통하여 항상 우리의 눈높이를 높이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불멸의 하느님이 죽음 이외에 다른 지평선이 있는 삶을 주셨을 수 있었을까? 선(good)을 주신 분이 삶의 감각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심이 단지죽음의 두려움에 가려지기 위해서일까?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 삶이라는 선물을 주신, 나의 존재를 빚진 것처럼 느끼고, 그분을 통해 나의 희망이 굳혀진, 하느님 아버지를 알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 하느님을 알려는 열정적인 욕구로 불타올랐다.
어떤 종교들은 남신, 여신 등 여러 종류의 신이 있다고 가르치고 사람들은 그들의 전체적 혈통을 추적한다. 다른 종교들은 힘이 센 신과 그렇지 않은 신이 있다고 가르치고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대신 온전히 진동과 충동으로 만들어진 자연을 숭배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며 그렇지만 그가 대부분의 인류에 잘 알지 못하고 무관심하다고 여긴다.
나는 유대인의 증언에 따른 모세와 예언자들이 쓴 책들을 우연히 발견 하였을 때 이런 여러 관점들을 반성해 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창조주 하느님이 “나는 나다.” 라는 이 말씀을 통해 스스로 증인이 되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지식을 총명한 언어로 표현한 이 통찰력의 완벽함에 놀랐다. 다른 어떠한 설명도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하느님이신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가질 수 없다.
나는 하느님이 없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우주는 하느님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천국에, 지옥에 그리고 바다 너머에도 계신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사시고 모든 것을 감싸 안으신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품으시고 우주에 품어지셨다: 그는 그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도 국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신다.
나의 영혼은 하느님의 지혜의 신비와 그의 순전한 장엄함을 묵상 하는 데서 기쁨을 얻고 아버지 창조주의 영원함과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열망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한계에 부딪혀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창조된 것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서 그것들의 창조주의 상응하는 지각이 나온다.”는 이 예언구절에서 하나님에 관한 거대한 진술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후 네 번 째 복음에서 사도들이 가르치는 진실에 대해 배웠다. 나는 내가 기대 했던 것보다 더 많이 하느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창조주가 하느님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임을 이해했다. 나는 말씀이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세상의 빛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말씀이 육체로서 나타나지고 우리 안에서 살아있음과 그를 환영하는 자는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 육체의 탄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 이해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나의 영혼은 내가 상상 했던 것 보다 훨씬 큰 희망을 발견했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나는 육체를 통해 하느님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기에 나의 영혼은 이 신비의 계시를 기쁘게 받았다; 나는 믿음을 통해 새로운 탄생으로 부름 받았다. 나는 자유를 받았고 높은 곳으로 부터 새로운 탄생을 받는 권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