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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키릴과 메토디우스

작성일 : 2015-09-05       클릭 : 624     추천 : 0

작성자 약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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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과 메토디우스(슬라브 선교사, 주교869/885)

 

콘스탄티누스(수도사가 된 후 키릴이 됨)와 그의 형 메토디우스는 그리스의 살로니카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키릴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왕립 학교에 보내져서 성 포티우스(Photius)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 그 대학에서 스승 성 포티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메토디우스는 옵시키온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는 총독이 되었다가 사직한 후로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는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황제 미카엘 3세가 러시아의 드니에프르강과 볼가 강변에 사는 카자르족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그들은 카자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키릴은 이후 몇 달 동안 교황청 왕립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메토디우스는 소아시아에 있는 폴리크로니온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 왕국의 왕의 요청에 따라 성 포티우스 주교는 키릴과 메토디우스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해 파견하였다. 들은 초기 서유럽인들의 사제가 라틴 관습을 강제로 토착민에게 강요했던 것과는 달리 토착민의 언어와 문화에 맞는 기독교신앙을 모라비안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키릴은 선교를 위해 성서를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키릴은 메토디우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일 성직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동안 라틴어만

사용하던 교회의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한 것과 또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왔으므로 혹시 서방교회의 이단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파사우(Passau)의 독일 주교가 사제 후보자 선발을 거부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 사건으로 두 형제는 교황 니콜라우스 1세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로마 로 가던 중에 교황이 서거하였다.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2세는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두 형제는 크림 반도에서 서거한 교황 성 클레멘스의 유해를 인도하여 교황의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키릴은 수도자가 되었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모라비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869214일 수도원에서 운명하여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한편 메토디우스는 교황 특사로서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돌아갔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를 독일 교계제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870년 독일의 왕 루드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메토디우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3년간 귀양생활을 하다가 교황 요한 8세의 중재로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한 8세 교황은 슬라브 지역에 대한 사도좌의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개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계속 적대적인 시선으로 메토디우스의 활동을 지켜보던 독일 교회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메토디우스를 이단자로 고발하였고, 880년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교황에게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한 끝에 결국 교황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882년 교황의 뜻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메토디우스는 제자 두 명의 도움으로 동생의 뒤를 이어 성서와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독일 교회와 메토디우스 간의 투쟁은 그가 885년 지금의 헝가리에서 건강 악화로 죽을 때 까지 계속되었다.

 

오늘날 키릴과 메토디투스는 슬라브의 사도유럽의 순교자로서 베니딕트와 함께 추앙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커다란 두 개의 줄기사이에서 진정한 에큐메니즘의 선구자로 영예를 받고 있다.

 

옛 슬라브족의 콘스탄틴의 생애로 부터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한 콘스탄틴이 병이 들었습니다. 오랜시간 동안 병으로 고생하면서 그는 하느님의 비젼을 경험했고, ‘우리가 주님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나의 영혼은 즐거워하고 나의 마음은 크게 기뻐합니다.’라는 시편의 음율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복을 입은 채로 하루 종일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나는 땅의 사람이거나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홀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신하입니다. 전에 나는 죽었지만, 지금은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살것입니다. 아멘다음날 그는 수도원의 습관대로 행한 후에 키릴이라는 종교적인 이름을 취했습니다. 그는 40일 동안 수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이 땅으로부터 평화로운 하늘의 본향으로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에게 기도하였습니다. ;“ !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의 하늘의 천사들과 영의 권세들로 합창단을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천국의 지경을 넓히셨으며, 땅을 만드시고 무로부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뜻에 복종하고 거룩한 두려움안에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기로 한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지금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신실한 사람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부적절하고 가치없는 하인으로 나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악과 당신을 모독하는 사람들의 모든 세속적인 교활함으로부터 지켜주십시오.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고 모두 하나가 되어 모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고백과 불변성에 대해 알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시켜주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당신이 기뻐하는 일과 삶을 살도록 그들을 북돋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나는 나에게 준 당신의 선물과 사람들을 당신에게 반환합니다. 당신의 강력한 오른손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당신의 날개의 그늘아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모든 찬양을 받으시고 당신의 이름이 영광 받으소서.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한때 그는 모든 사람과 평화의 선물을 교환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은총의 하느님! 우리를 보이지 않는 적에게 넘겨주시지 않고, 그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42세의 나이에 주님품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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