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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도미닉

작성일 : 2015-09-05       클릭 : 114     추천 : 0

작성자 약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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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사제, 수도원 설립자, 1221)

 

도미닉은 1170년 에스파냐 북부 부르고스(Burgos) 지방의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그곳 총독인 펠릭스 데 구스만과 요안나 폰 아자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도미닉이 태어나기 전 그의 어머니 요안나는 횃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오고, 개가 태어나자마자 온 세상이 불이 붙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꿈을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이 말로써 세상을 불태우게 될 태몽으로 해석하였다.

 

도미닉은 신앙심이 두터운 부모에게서 자랐으며, 7살 때에는 사제였던 숙부한테서 일찌감치 성직 교육을 받았다. 1184, 14살이 된 그는 교육의 중심지로 유명한 팔렌시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10년간 열심히 문학과 신학을 배웠고, 24살 때 오스마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Osma)에서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203년 오스마 주교를 수행하여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 갔다. 남부 프랑스지역을 여행하던 중 당시의 이단인 카다리파(Cathars, 일명 알비파, 물질적인 세계는 악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저등한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단)의 지도자들은 잘 교육받고 조직적인 면에서 막강하였으며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는 반면 카톨릭의 사제들은 경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카다리파의 지도자들만큼 금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들을 길러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204년 도미닉은 다시 그의 주교 디에고가 교황의 명에 의해 이단이 번창하고 있는 덴마크 등 북유럽으로 전도여행을 떠날 때 동행하였다. 이때 도미닉은 알비파의 이단 사상을 직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평생의 소임, 즉 알비파 신도들을 다시 교회와 화해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설교 수도회를 설립하여 로마 카톨릭 문화의 연구 중심지로 삼고 설교 수도사들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Albigenses) 지역인 프루이유(Prouille)에서 여자 수도회를 설립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이것이 도미닉 수도회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1208년 교황대사 베드로 카스텔란이 알비파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켄티우스 3(Innocentius III)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Simon IV de Montfort)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성 도미닉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남부 프랑스지역에서 이단을 몰아내기 위해 적절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도미닉은 설교자로서 남부 프랑스로 보내어졌고. 도미닉은 그곳에서 카타리파 이단들이 비록 진리에 서있지는 않았으나 청빈한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음을 보고, 말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설교할 때 진정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카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툴루즈(Toulouse)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 후 성 도미닉은 수도회의 조직을 위해 여생을 보내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그리고 프랑스 등지를 다니며 순회 설교를 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회원이 새로 입회하면서 수도회도 정착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지성적인 생활과 대중들의 요구를 잘 조화시켜 회개운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도미닉은 청빈을 강조하여 1220년 제1회 도미닉설교자수도회 총회에서 탁발(구걸, 그 당시까지의 성직자들의 구걸생활은 금지 금지되어 있었다)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규약을 제정하였는데 개인도 교회도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수도사 개인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수도원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도미닉설교수도회는 수도원의 재산 소유도 불허하였다. 도미닉 수도회는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된 프란시스 수도회와 함께 중세 카톨릭의 양대 탁발 수도회라 할 수 있다.

 

도미닉은 1220년에 볼로냐(Bologna)에서 수도회의 첫 번째 총회를 소집한 후, 이듬해인 122186일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헝가리 순회 선교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일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도미닉이 죽고 난 후 도미닉설교자수도회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독일 등 전 유럽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천문학자의 수호성인이다.

 

수도회의 설교자의 역사의 자료로 부터

도미닉은 매우 청렴한 소유자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총과 존경을 품은자로서 증명 된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강하게 움직였다. 그는 동정심과 연민에 대해 움직일 때 이외에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쁨에 넘치는 마음이 얼굴에 생기를 주기 때문에, 마음을 밝게 하는 표정과 외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지는 친절함속에서 영적인 사람의 평화로운 침착함을 보여 주었다.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길을 보여주었다. 낮동안에는 거의 아무도 동료들에 대하여 상냥하거나 또는 공동체 의식이 없었다. 밤 시간동안에는 거의 아무도 애원이나 철야 같은 것을 지속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미닉은 기도하거나 그의 형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하느님에 관해서 말할 때 외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도미닉은 자주 하느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효과적인 돌봄을 위해, 진실한 자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해 주기를 청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 주었을 때, 진실로 그리스도의 일원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일을 위해 신중히 계획하고 오랜 시간 면밀히 검토한 후에, 도미닉은 수사 설교자들의 순서(the Order of friars Preachers)에 대한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그의 대화와 편지에서 그는 자주 신구약 성경을 계속적으로 연구할 것을 형제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는 항상 마태복음과 바울서신을 지니고 다녔으며, 그것들을 암기할 때 까지 연구하였다. 두 세번 도미닉은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항상 그 자리를 거절하고 가난한 형제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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