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아씨시의 클라라(작은자의 수녀원 설립자, 1253년)
아씨시의 성녀 클라라는 이탈리아 아씨시의 귀족 파바로네와 오르똘라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클라라의 이름은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클라라는 1210년 사순절 때 겸손과 고행의 모습으로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하는 프란치스코에게 감명을 받아 자기의 모든 소유와 가족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클라라가 18세이던 1212년 클라라는 가족들이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 성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으로 갔다. 그러나 형제회에는 여자 수도원이 없어서 클라라는 근방의 베네딕도 수녀원에 머물렀다. 클라라는 1212년 3월 18일 성지주일에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보속의 수도복'을 받고 순명을 서약하고 축성의 의미로 머리칼을 모두 자르고 수녀로서 주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가족들이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 오기 위해 찾아오자, 성녀 클라라는 제대에 꼭 기대어 자신의 삭발한 머리를 내 보이며, 자신은 수도를 결심하기로 작정하였으므로 뜻을 바꿀 수 없다며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얼마 후 성녀의 동생 아네스도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집을 나왔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 뒤를 따르자 친지들은 아녜스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에게서 동생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첫 자매를 얻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받아, 친동생 아녜스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가 마련해준 성 다미아노 수도원의 봉쇄 안에서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로 프란치스칸적 관상의 삶을 시작하였다.
후에 클라라는 아씨시의 성 다미아노(St Damiano)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클라라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같은 형태로 수녀원 운영을 하였다. 낮에는 땀 흘려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한 묵상과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클라라는 금식과 절제의 생활에 전념하였다.
클라라는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늘 귀 기울이며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육화한 '가난한 동정녀'로 살았던 클라라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작은 형제들은 물론이요 교황과 추기경 및 왕과 귀족들까지 기도를 부탁하며 자문을 구하러 왔다.
클라라에게 있어 기도는 자신의 존재 전부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사랑함이었고, 수도원의 봉쇄는 주님과 단둘이 누리는 자유의 공간이었으며, 가난은 그리스도를 관상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클라라는 가장 값진 진주인 천상에 대한 소망은 현세적 물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는 소유할 수 없다고 여겼다. 클라라의 엄격한 고행 생활은 건강을 해치게 되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되었으나 성녀 클라라는 병고를 기꺼이 참으며 틈틈이 바느질을 하거나 자수를 놓아서 움브리아 지방의 가난한 교회에 보내기도 하였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작은 빵 하나를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하였으며, 간절한 이웃 사랑에서 우러난 그녀의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가 완쾌 되었다. 또한 성녀 클라라는 자신에겐 극히 엄격하였지만 동료 수녀들에게는 어머니처럼 인자 하였다. 성녀 클라라의 덕을 사모하여 그 주변에 수도를 희망하는 여인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성녀의 어머니도 남편과 사별한 후 수도생활을 하였다.
1240년 독일 황제 프레데릭 2세와 동맹한 사라센 대군이 움브리아 지방의 각 촌락을 점령하고 아씨시에 까지 쳐들어 왔을 당시 클라라는 자매들의 부축 없이는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지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수도원 가족과 아씨시 시민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오로지 성체께 의탁하고 기도하였다. ‘주님, 저는 당신이 사랑하는 동정녀들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원하오니, 당신이 직접 전능하신 힘으로 그들을 보호하여 적의 손에 넘기지 말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를 바치고 일어나서 성광을 모시고 천천히 적군 앞으로 나아가자 성광에서 신비한 빛이 나서 이미 봉쇄구역 안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이 겁을 먹고 물러갔다 한다.
또 1252년 성탄 밤, 중병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아기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큰 열망으로,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한 듯이 선명하게 미사를 볼 수 있었던 기적을 계기로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젼의 주보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1253년 8월11일 가난의 특전을 간절히 원하던 교황칙서를 첨부한 자신이 만든 수도회칙을 받은 클라라는 큰 감격에 넘쳐 회칙을 가슴에 안고 세상을 떠났다. 이 회칙의 원본은 1893년 성녀 클라라의 시신을 덮고 있던 수도복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1255년 클라라는 시성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다미아니떼 수녀들은 ‘클라라 수도회’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성녀의 삶이 배어있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성당과 유해가 모셔진 아씨시 성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녀 글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생각 하십시오.
전심으로 그리스도께 매달려 그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놓습니다.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 넘쳐흐르게 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감미로운 빛으로 빛나게 하며
그분의 향기는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분을 직접 보는 영광스러운 천상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에게 행복을 줄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 없는 거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여,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안팎으로 단장하고
여러 색깔의 꽃들로 치장하여
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과 정결한 정배에게 있어야 하는
온갖 덕행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거울 전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거울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본다면 말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분의 가난을 볼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여! 비할 수 없는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본다면
그 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복된 가난을 볼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본다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거울께서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겪던 고생 같은 고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외치고 울고 있는 그분께 한마음 한 목소리로 대답합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내 마음 괴로워하겠나이다."
천상 임금의 왕후이신 아녜스여,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금님의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부요와 끝없는 영예를 바라보시고
열렬한 갈망과 마음의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분께 이렇게 외치십시오.
"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당신을 뒤따르게 해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방향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당신께서 나를, 술 방으로 이 몸을 데리고 가실 때까지,
당신께서 왼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 당신 바른손으로
기쁘게 이 몸 안아 주시며 당신의 그 입술로 나에게 입 맞춰 주실 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달려 가리이다."
사랑하는 아녜스여,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할 때 이 가련한 어머니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기억은 내 마음 안에 굳게 새겨져 있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