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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의 봉헌 축일


8월 27일 모니카

작성일 : 2015-09-05       클릭 : 151     추천 : 0

작성자 약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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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히포의 어거스틴 어머니, 387)

 

경건한 어머니의 표상인 성녀 모니카는 AD 332년 아프리카 북쪽, 지금의 알제리의 북동부에 위치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양친은 기독교 신앙이 돈독했던 명문 출신으로, 모니카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위기 가운데서 자랐다. 어린 모니카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재미있고 온순한 아이로 기도나 교회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특히 병중에 있는 빈민에게는 따뜻한 동정의 손을 펴 가끔 자기의 음식물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용감스런 순교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 중에서 누가 순교자의 이야기만 하면 언제나 열심히 듣곤 하였다. 이와 같은 성격과 신심 때문에 사람들은 모니카가 수도자로서 처녀로 일평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양친은 모니카를 결혼시키려고 결정했고, 그녀는 온순히 부모의 뜻에 따랐다.

 

모니카의 배우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파트리시우스라는 이교도인이었다. 그는 로마사람으로 모니카와 나이차이가 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한량이었으며 모니카의 자비심과 동정심을 비난했다. 게다가 시어머니마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사에 모니카를 괴롭혔다. 하지만 모니카는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결국에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회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니카의 기도와 신념처럼 시어머니가 먼저 그녀의 아름다운 태도에 감복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후 남편 파트리시우스도 모니카의 일상생활에 감명을 받아 행동을 고치며 종교 이야기에도 점차 귀를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세례를 받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가 되었다.

 

남편 파트리시우스는 세례를 받은 지 1년 후인 37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모니카에게는 어거스틴과 나비지오, 딸 페르페투아 삼남매가 있었다. 그 중 맏이인 어거스틴이 가장 유명하지만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괴롭힌 불효자였고, 어거스틴의 남동생 나비지오는 성실한 교회 감독으로, 또 여동생 페르페투아는 어머니를 닮아 탄복할만한 신심을 가진 여성수도원 책임자로서 성별된 삶을 살았다.

 

남편 파트리시우스가 죽었을 당시 장남 어거스틴은 17세였으며, 카르타고의 수사학교 학생이었다. 남편이 죽기 전 가정 형편이 좀 나아지자 어거스틴의 부모는 어거스틴을 공부시키기 위해 나머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저버리고 향락에 빠졌으며 오래지 않아 마니교에 들어갔다. 어거스틴의 학교성적은 우수하였으나, 이것이 어머니 모니카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한 아프리카 여자와 사랑에 빠져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아들의 앞길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니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들과의 관계를 끊고 집안 출입을 금하는 등 강경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생각하다 참지 못하게 된 모니카는 타가스테 교회의 감독을 방문하고 자기 고민을 털어 놓았다. 감독은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말하는 모니카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모니카는 감독의 그 말을 천상으로부터 받은 대답으로 생각하고 더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때부터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아들의 구원을 위해 매달렸다. 모니카는 아들의 품행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를 독한 말로 꾸짖지 않았다. 도리어 부드러운 태도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남몰래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29세가 되었을 때,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로마로 가서 자신을 꿈을 펼치고자 결심했다. 모니카도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거스틴이 어머니에게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선창에 간다고 말하고는 그길로 동거하던 여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가는 배를 타버렸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자신을 떼놓고 떠나버린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모니카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뒤를 따라 그녀도 로마로 갔다. 하지만 모니카가 도착했을 때 어거스틴은 이미 로마를 떠나고 없었다. 수소문 끝에 어거스틴이 밀란으로 간 것을 확인하고서, 비록 여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니카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밀란으로 갔다.

 

그런데 밀란에는 당시 가장 존경받던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가끔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가게 되었는데, 모니카의 기도 덕분인지,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 진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모니카는 고향 타가스테에 있었을 때와 같이 밀란에서도 신앙심 깊은 부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거스틴이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했다. 드디어 AD387년 부활절에 어거스틴과 그의 친구 몇 사람은 암브로시우스감독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던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헌신이 결국 하늘을 감동시키고 아들을 살려내었다.

 

아들을 위해 무려 16년간이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도 오직 자식의 회심을 위해 눈물과 기도의 헌신을 다해온 모니카는 아들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병을 얻게 된다.

 

어거스틴은 개종 후 밀라노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르는데, 배를 타기 위해 이탈리아 오스티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모니카의 병이 깊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의 회심으로 인한 기쁨에 모니카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니카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서의 가장 큰 소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 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주님의 자녀가 되는 바로 그것이었단다. 하나님께서 과분하게도 내 청을 들어주셨구나.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니?”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이리하여 위대한 눈물의 어머니 모니카는 회심한 아들 어거스틴의 간호를 받으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때는 AD387, 모니카의 나이 56세였다.

 

이후 어거스틴은 고비마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과 눈물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했고, 사도 바울의 뒤를 계승하는 기독교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설 수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 없이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음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어거스틴의 <고백론>중에서

모니카는 주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녀 마음의 가르침 안에서 내면의 선생이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던 그날은 아주 긴박했었다. 그녀의 죽음은 당신의 숨겨진 방식을 통하여 내가 당신의 섭리를 믿게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녀와 나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 집은 테베레 강가에 있는 오스티아에서 우리가 머물고 있었던 곳이다. 그곳은 한적한 곳으로, 긴 여행으로 지쳐서 다음 항해를 위해 우리의 기운을 거기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 하였다.‘과거를 잊고 앞에 놓여 있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우리는 함께 진리에 직면하여 당신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을

수도 없고, 사람이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삶을 성인들의 영원한 생명이 소유하게 될 삶의 본질이 무엇일까 물었다. 그러나 마음의 입을 크게 벌리고 우리는 높은 곳에 있는 당신의 샘물로부터 흐르는 물을 마셨다. 그 삶의 샘물은 당신과 함께 있다. 우리 능력의 한계를 이 물로 촉촉이 적시고, 우리의 마음은 아주 위대한 실체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고 얼마간 시도했다. 그 대화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었다. 육체의 감각의 즐거움은, 물질세계의 빛나는 빛 안에서 매우 유쾌한 것일지라도, 가치 있게 고려되지 않지만 영원한 삶과 비교함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말했듯이 나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 자신과 같은 나의 아들아,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는다. 아직까지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희망은 이미 이루어졌다. 내가 이 세상에 좀 더 머무르기 원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카톨릭 크리스찬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의 하느님은 내가 희망했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왜냐하면 네가 그의 종복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성공을 혐오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이것에 내가 무어라고 답했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다. 왜냐하면 5일안에 아니 5일이 넘지 않게 어머니가 병이나 심한 열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픈 동안에 하루는 의식을 잃고 점차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빨리 의식을 회복하였다. 어머니는 그녀 옆에 서있는 나와 나의 동생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 같은 태도로 우리에게 말했다. ‘내가 어디에 있었지? 그러면서 슬픔으로 말을 잃고 서있는 우리를 보면서 너의 엄마를 여기에 묻어다오하고 말하였다.

 

나는 침묵하면서 눈물이 나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내 동생은 마치 그녀에게 기운을 북돋우려는 것처럼, 그는 어머니가 외국 땅에 묻히지 않고 고향에 묻히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자,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며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나무라셨다.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네 동생이 말하는 것을 들었지.’그리고 곧 우리 둘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곳에 나를 묻거라. 너희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단지 나는 한 가지 만을 부탁하겠다. 너희들이 어디에 있든 주님의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 때 그녀의 생각을 이와 같은 말로 설명하셨다. 그리고 병이 악화되어 말이 없어지면서 말했다. ‘아무것도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의 끝날에 나를 인정하지 않을까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을까 두려울 이유가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녀가 병이 난지 9일째 되던 날, 그녀의 나이 56세였고 내가 33세였을 때, 신앙심이 깊고 경건한 영혼이 그녀의 몸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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