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
히포의 어거스틴(주교, 증거자, 430년)
어거스틴은 354년 북아프리카의 루마디아 지방에 있는 타가스테(Tagast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사람으로 이름은 파트리시우스였으며, 어거스틴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타가스테 시의회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대단히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교도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모니카는 자기 아들을 기독교 신앙의 규범에 따라서 엄격히 가르치려고 했다.
어거스틴이 16세가 되던 해 그의 부모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해 북아메리카 지역의 로마 행정 중심지였던 대도시 카르타고로 보냈다. 항구 도시인 카르타고는 이교 사상과 기독교, 상인과 군인, 옛 것과 새것이 뒤 섞여 있었고, 물질주의와, 감각적인 쾌락과 오락들이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어거스틴도 그 도시의 감각과 쾌락적인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 371년에 카르타고에서 어거스틴은 한 여인과 동거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372년에는 아들을 낳았다. 어거스틴은 그의 아들 이름을 아데오다투스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카르타고에서 어거스틴은 욕정의 노예로 살았고, 인간이 갖는 모든 삶의 모순 속에서 방황하며 살았다. 이러한 온갖 방탕한 삶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마니교 사상에 의하면, 이 세상은 보이지 않은 두 개의 물질인 ‘선과 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 안에서 악의 원리가 강하면 악을 행하게 되고, 선의 원리가 강하면 선해 진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9년 동안 마니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악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당시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빠진 것을 알고 눈물로 기도했다. 교회의 감독은 모니카에게 “오직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는 독서를 통해 스스로 잘못이 무엇인지 발견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주교인 파우스트를 만났는데 자기의 고민거리를 명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니교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공부를 마친 뒤 타가스테에서 잠시 라틴어와 문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374년 가을에는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가 수사학 학교를 개교하였다. 그의 학생들은 그를 잘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출세를 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어머니 모니카를 버려둔 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갔다. 이때가 어거스틴이 29살이 되던 해였다.
로마에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주후 3세기경에 시작된 철학적 경향으로 고대의 철학사상들,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집대성한 것임)를 접하게 되면서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이 철학 속에서 물질 현상을 정신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을 뿐 아니라 악의 문제를 마니교의 용어로 설명하는 방법이 아닌 부정 즉 무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에도 궁극적으로 은혜라는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다가 383년 마니교도인 그의 친구가 밀란에 수사학 교수 자리를 소개해주자 밀란으로 갔다. 밀란에서 그는 밀란의 주교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한번은 어거스틴이 직접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이 청년의 영혼 상태를 간파하고 온화한 태도로 일일이 확증을 들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대단히 감동되었으나 아직 내면에 뿌리 깊은 갈등, 즉 한편에서는 명예, 재물, 정욕 등이 그를 이끌고 가는 세속적 집착과 다른 한편에는 암브로스 주교의 설교를 통해 그에게 보여주는 대로 하느님을 따라서 고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갈등 속에서 자기 거취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 거룩한 이집트의 은둔수도자들의 전기를 읽게 되었고, 저들의 고행과 수련생활에 매우 감동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거스틴은 자기 집 정원 울타리 밖에서 한 어린 아이가 여러 번 반복하여 “톨레 레게”(tolle lege-취하여 읽으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집으로 뛰어 들어가 성서를 펼쳐 들고 읽었다.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였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롬 13:12-14) 여기까지 읽은 어거스틴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확실히 깨닫고 387년 33살이 되던 해 부활절에 그의 친구 알리우스와 자기의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해서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로 갔다. 이 항구에서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영적인 담화를 하고, 천국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오스티아라는 작은 항구에서 어머니 모니카는 죽었다. 그 다음해에 자기고향인 누미디아로 돌아가서 작은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 생활을 한다. 이 수도회가 발전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어거스틴파 수도회이다. 이 와중에 자신이 크게 사랑하던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하였다.
391년에 누미디안 근처에 있는 히포에 방문하던 중 히포의 감독 발레리우스의 권유로 장로가 되어서 히포의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감독의 조수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또 다른 수도회를 세웠다. 히포는 정통 교회와 도나투스파 사이에 알력이 있는 도시였다. 어거스틴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어거스틴의 생활방식, 설교, 신령한 주석들 그리고 신학적인 저술 등을 통해서 목회자들에게서도 크게 존경을 받았다. 감독은 자기의 임종이 가까운 것을 알고 어거스틴을 히포의 부감독으로 임명했다. 1년 뒤에 감독이 죽자 어거스틴은 그를 이어서 396년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히포의 감독이 된 어거스틴은 이후로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고 마니교, 펠라기우스논쟁 도나투스와의 투쟁을 벌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최고 걸작들인 고백록,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의 집필에 착수했다. 어거스틴은 히포가 만달족에게 포위 된지 3달만인 430년 8월 28일에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나는 경고를 받으면서 내면의 자아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를 인도하시면서 나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영혼의 눈으로 내 영혼의 눈보다 위에 계시고, 내 마음보다 위에 계신 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은 모든 육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의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기름이 물위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상에 있는 것도,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위에 있는 빛이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그 아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그 빛을 알며,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것을 압니다.
오, 영원하신 진리여! 참된 사랑과 사랑 받으시는 영원하심이여!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께 나는 주야로 행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당신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나를 높이 드셔서 나로 하여금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를 막고 있던 연약함을 뒤로하시고, 나에게 강력한 빛을 부으실 때 나는 사랑과 두려움으로 떨렸으며,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이런 음성을 듣는 것처럼 나는 당신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강한 사람들의 음식이며 너는 나를 먹어야만 하며, 너는 나를 너의 육신의 음식처럼 변화시킬 수 없지만 너는 내 안에서 변화될 수 있다.’
당신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며, 내 영혼을 거미처럼 삼킬 수 있는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렇게 물을 때, ‘공간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유한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닙니까?’ 그러자 당신은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내 마음의 귀로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의심의 구름을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피조물들로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진리와 함께 살지 않을 것을 의심할 것입니다.”
나는 내 영혼에 깊이 감춰진 것을 살펴봄으로 비참한 나 자신으로 괴로워했습니다. 내 마음의 눈앞에 그것들을 놓았을 때 내 안에 큰 폭풍이 몰아쳤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 멀리 혼자 떠나서 그조차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했으며 흐느껴 우는 목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여깁니다. 나 자신을 치면서 어떤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의 눈물을 자유스럽게 흘렸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얼마나?’ ‘영원한 당신의 화를 받을 것인가? 오, 과거의 죄악을 기억나지 않게 하소서!’ 저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하염없이 부르짖기를, ‘내일, 내일이냐? 하면서 얼마나 미룰 것인가? 왜 지금이라 하지 못할까? 지금 이 순간 나의 추악한 죄들을 마무리하지 못하는가?’ 이런 말들을 거듭하면서 찢어지는 나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물으면서 내 마음에 처참한 비통을 한 동안 괴로워하고 있을 때 가까운 집에서 한 어린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갑자기 들었습니다. 소녀였는지 소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를 불렀습니다. ‘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 단순히 어린아이들이 뛰어 놀면서 부르는 노래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 일어나서 이것이 성경 말씀을 열어보고 보여주시는 첫 장을 읽으라 하나님의 명령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복음이 갑작스럽게 읽으면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으로 느껴서 ‘가서 모든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앤터니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신탁으로 그는 당신께로 개종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나는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곳에 사도의 말씀을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펴서 조용히 처음 직면하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을 수도 없었고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문장을 순식간에 읽는 순간, 믿음의 빛이 나의 마음에 밀려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책을 덮고 손가락으로 그 곳을 끼어놓고 이 사실을 알리피우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 우리는 함께 모친께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모친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즐겁게 뛰시면서 승리에 찬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보다도 훨씬 위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그렇게 애타게 슬퍼하며 기도하셨던 것보다 더한 것을 받으셨다는 것을 찬양 드렸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므로 나는 이 세상에서 바라는 그 어떤 것도, 아내까지도 당신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신앙 / 생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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