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대 그레고리(로마의 주교, 증거자, 604년)
그레고리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와 함께 서방교회의 중요한 4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 고르디아누스(Gordianus)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고르디아누스는 신심이 두터운 사람이었고 어머니 실비아 역시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이다. 그레고리 1세는 로마(Roma)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스티노 황제의 신임을 받아 서른 살에 로마 시 장관으로 임명되어 공직에 몸을 담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레고리는 574년경 공직에서 물러나 상속받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고 로마와 시칠리아에 7개의 수도회를 세우고 베네딕도회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의 수도원생활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것이었다. 수도자가 된 그는 전심전력으로 덕을 닦고 회칙을 엄수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지나칠 정도로 금식재를 지켰다. 그는 579년부터 585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활약하다가, 5년 후인 590년 펠라지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수도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에 추대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교황직을 거절하였다."괴로운 심정으로 영예의 짐을 떠맡았으며, 너무 슬퍼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그 영혼의 눈은 슬픔으로 어두워졌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라벤나의 교구장 요한 대주교는 교황직을 수락하기를 꺼려한 그를 꾸중하였다.
그레고리는 교황좌에 오른 후 자신의 입장을 밝힌 유명한 사목규범서를 책으로 엮어 요한 대주교에게 답신 형식으로 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주교의 직책과 의무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외에도 에제키엘서에 관한 설교, 복음서 해설, '모랄리아'(Moralia, 욥서 주해), '대화집'을 비롯하여 8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특히 대화록은 베드로 부제를 내세워 대화를 나누면서 교황 자신의 영성적이며 윤리적인 사상을 전하고 있고 성 베네딕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가장 훌륭하고 실제적인 근거가 되는 자료이다.
그의 글들은 주로 목가적인 형식으로 씌여졌다. 그의 영성은 사랑의 역학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생기가 넘쳤다. 실제로 그는 때때로 “갈망의 박사” 라고 불리워졌다. 그레고리에게 갈망이란 하나님에게 가는 여행으로 비유되었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개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로마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는다.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 시켜 교황의 권위 하에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으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그레고리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던 시기에 빈틈없는 행정가이자 외교관의 모습을 입증했고 롬바르드족과의 평화도 확립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롬바르드족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593년 그는 롬바르드족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평정시켰으므로 롬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서기 60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서거 즉시 시성되었다.
위대한 그레고리의 설교로 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전달하려 보내신 예언자 에스겔은 파수꾼으로 설명되고 있다. 파수꾼은 사물을 잘 관찰하기 위하여 항상 높고 잘 보이는 위치를 택한다. 그렇듯이, 파수꾼으로 지명된 자는 그의 사람들을 넓은 안목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항상 언덕위에 살아야한다. 나는 이런 말을 하기가 힘든데 이유는 스스로에게 자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나의 설교는 평범하고 나의 삶은 내가 설교하는 가치들과 충분히 일관성이 있지 못하다. 나의 무기력함과 부주의함을 알기에 나는 내가 죄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나의 결점에 대한 확실한 인식은 나에게 동정어린 판단으로부터 용서를 얻게 해 줄 것이다.
수도원에서 사는 동안 나는 쓸모없는 잡담을 줄이고 나의 마음을 기도 훈련에 지속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목회자 돌봄의 짐을 떠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다른 여러 의무들로 산만해져서,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나는 교회와 수도원들과 일들을 처리하는 책무가 있었고 가끔은 사람들의 인생과 행동을 판가름해주어야만 했다. 나는 한때는 시민의 삶에 참여해야 했고, 다른 한때는 이방인들의 급습을 걱정해야 했다. 나는 나의 돌봄하에 맡겨진 양떼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늑대들을 걱정한다. 다른 어느 때는 나는 법을 유지시키는 자들을 지지하기 위하여 정치적 책임을 행사해야 된다. (나는 범죄자의 사악함과 그들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 그리고 그럼에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상황들에 대처해야 한다.)
나의 마음은 내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심각한 많은 문제들로 혼란 속에 있다. 내가 설교를 위해 지적인 자원에 집중하려고 할 때, 말씀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내가 공평(정의)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종종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나의 일(직무)을 억지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연설의 수양을 늦추어야 한다. 만약 내가 나의 양심이 지시하는 변함없는 대화의 패턴을 유지한다면, 어떤 약한 사람들은 나와의 교제를 피할 것이고, 그 결과 나는 내가 그들을 위해 희망하는 나의 목표에 그들을 결코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분별없는 잡담을 듣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점차적으로 그들의 나태한 말들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전에는 들으면 움찔했던 말들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에는 내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의식하였던 것과는 반대편에서 즐기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종류의 파수꾼인가? 나는 성취의 정점에 서있지 않고 허약함의 구덩이에 머물러있다. 그렇게 내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의 창조자이자 구세주 께서는 나에게 인생을 온전하게 보는 은혜와 그것을 바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함이 내가 그를 설교하는데 모든 걸 받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