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탈수스의 데오도르 (캔터베리의대주교, 서기 690년)
데오도르는 실리시아의 타루스스에서 서기 602년경 태어났다. 그는 아시아계의 그리스인 이였고, 60세 되던 해 교황에 의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 받기 전까지 아테네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부제에서 곧바로 관구의 대 주교로 상승했지만 도착 이후 영국의 모든 곳을 방문하여 규율을 바로잡고 전례음악을 영국교회에 도입함으로써 그의 가치를 입증해냈다. 그는 교구의 분할로 영국교회를 개혁하는데 착수했고, 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의회인 하트퍼드의 종교 회의를 서기 673년 9월 24일에 소집했다. 이것은 영국에서 최초로 소집된 전국적인 교회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부활절 축일을 로마관습과 일치시켰으며 잉글랜드 부제제도를 확립하였다. 또한 성직자들과 종교인의 권리와 의무에 관련된 교회법을 발행하였다: 법은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서만 일 할 수 있고, 이웃 고위 성직자의 사역에 침범하는 것을 제한하였고; 주교 제도 안에서의 우선함을 설립하였고; 수도승들이 그들의 수도원에 안정적으로 남아있고 수도원장에게 순종적일 것을 보장하였고; 교회의 질서와 관련된 다른 많은 일들을 관여 하였다. 교회법은 칼케돈 의회의 법을 기반으로 하였다. 데오도르는 앵글로색슨 영국과 동맹을 희망하는 첫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입증되었다. 그는 서기 690년 이날 사망하였다.
수사 배데의 <영국 교회와 인물의 역사>로 부터
성 데우스데티투스의 죽음을 뒤로, 캔터버리 교회와 관구의 여섯 번 째 대주교는 오랜 시간 공석이었다. 켄트의 왕 에그버트와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는 위그하드라는 사제를 로마로 보내며 그가 영국인들의 대주교로 임명 받을 수 있도록 공동으로 요청하였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도착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를 비롯한 그의 동반자 모두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비탈리아누스 교황은 이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한 후 영국교회의 대주교로 보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 시절 로마에는 실리시아의 타르루스 출신에 데오도르 라는 수도승이 있었다. 그는 신성하고 세속적인 문학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모두 교육받았고, 진실성을 입증 받았으며, 예순여섯의 덕망 있는 나이였다. 아프리카 태생인 이자 나폴리 근처의 수도원의 수도원장 이였던 하드리아누스는 데오도르를 교황에게 추천했고, 교황은 하드리아누스가 여러 선교활동으로 갈리아를 두 번 여행 한 적이 있어 길을 잘 알뿐만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가 데오도르와 함께 영국으로 동행한다는 조건하에 데오도르를 성직에 임명하기로 했다. 교황은 또 하드리아누스에게 데오도르의 가르침을 완전히 지지 할 것을 명령했고 다만 참 믿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그리스 관습을 지배하는 행위는 교회에 들이지 말게 확실히 하라고 명령했다.
데오도르는 캔터버리에 그가 임명 된지 2년 후인 5월 27일 일요일에 도착해 21년 3개월 26일 동안 관할구를 맡았다. 그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영국인이 살고 있는 섬의 모든 지방을 방문했고 어디에서든지 환영을 받았다. 그는 모든 여행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동행과 도움을 받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부활절을 교회법대로 섬기는 법을 가르쳤다.
데오도르는 영국의 모든 교회가 섬기기로 동의한 첫 대주교였다. 그 이후로도 그와 하드리아누스는 내가 지켜 봐 왔듯이 신성하고 세속적인 문학을 배우는 자 들 이였고,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마음에 유익한 가르침을 매일 부어주었다. 그들은 신성한 성서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학생들에게 시, 천문학, 그리고 교회 달력의 계산법도 가르쳤다. 이것의 증거로, 아직도 살아있는 그들의 몇몇 학생들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현지인처럼 능숙하다.
영국인이 영국에 정착한 이후 그때처럼 행복하던 시절이 없었다; 그리스도인 왕이 매우 강해 잔악한 부족들을 모두 위압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 찾은 천국의 기쁨을 열렬히 추구하였고, 성서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가르칠 스승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