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프란시스 사베리오(선교사, 동양 수호성인, 1552년)
프란시스는 1506년 스페인의 나바레에 있는 사베리오의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로욜라의 이구나티우스와 함께 교육을 받았고, 그리고 예수회의 첫 번째 멤버로서 서약한 7명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해외에서 복음을 전파한 이래로 제수이트(예수회)의 소명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프란시스는 1541년 인디아의 서쪽해안에 있는 고아를 향해 항해를 하였다. 그는 인디아의 동부 전역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로 인해 2천명의 사람들이 기독교로 전향하였고, 이들을 위해 일본, 말라야, 말라카, 셀리언 등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직후 1552년 12월 배에서 죽었다.
우리는 몇 해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새로운 신자들의 마을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포르투칼 사람들이 여기에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 이 나라는 아주 황폐하고 가난합니다. 토박이 기독교인들을 위한 사제도 없습니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이 크리스찬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을 위해 예배에 대해 말해줄 사람도, 신조를 가르쳐줄 사람도, 성모송과 하느님의 법인 십계명에 대해 가르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도착한 그날 이후로 나는 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성실하게 마을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세례를 베풀지 못한 모든 아이들의 세례의 성스러운 물에 젖어있습니다. 이 말은, 속담에 그들은 왼손이 오른 손에 말할 수 없었다고 한 것처럼( 오른손과 왼손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내가 정화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큰 아이들은 내가 그들에게 기도나 다른 것을 가르쳐 줄때까지 내게 졸라서 나는 사무실에서 먹거나 자거나 말할 수도 없답니다. 그때 나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나는 양심의 가책 없이 경건한 마음을 나타내는 이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먼저 그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신앙 고백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과 주의 기도, 마리아송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나는 그들 안에서 위대한 지성의 인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그들을 교육할 수 있다면, 그들은 훌륭한 크리스찬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여기에 있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단지 한 가지 이유로 크리스찬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크리스찬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유럽대학들, 특히 파리에 있는 대학을 둘러 볼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자선보다 배움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당신들의 게으름 때문에 천국의 닫힌 문 앞에 서 있으며, 지옥으로 떨어지는지!’ 나는 그들이 그들의 학문에 열중하는 것처럼, 이 일에도 열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진 재능과 배움에 대해 하느님과 계산서를 정해 놓기를 원했습니다.
이 생각은 대부분의 그들을 영적인 현실감 위에서 명상하도록 하고, 하느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듣도록 확실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인간사를 잊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의지와 선택에 자신을 내어 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온 마음으로 울부짖을 것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당신이 원하는 곳에 나를 보내소서. - 심지어 인도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