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존 위클리프(종교개혁자,1384년)
위클리프는 요크셔에 있는 리치몬드에서 1330년에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 멀튼 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베일리얼에서 석사를 하였다. 1360년 베일리얼 칼리지 교양학부 학생감이 된 뒤 학장에 임명되었으나, 1361년 학장직을 사임하고 그 대학이 주는 최고의 성직록인 필링엄 주교대리가 되었다. 그뒤에 재속(목회) 성직자들과 정규(수도원) 성직자들을 위해 설립한 캔터베리 홀의 학장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재단의 편을 들고 있는 캔터베리 홀의 감독관을 제명함으로 법적인 소송에까지 이르렀으며, 그의 생애 동안 수도원에 관한 것들을 미워하였다. 위클리프는 왕족들과 훨씬 가까이 지냈다. 위클리프는 교회법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교황·추기경· 성직자들에게는 보수가 높은 세속 직업이라고 혹평했으며, 수사들과 탁발수사들에 대해서는 14세기 종교논쟁에서 사용된 것보다 훨씬 더 신랄한 용어로 비판 했다. 이로인해 그의 지위가 박탈당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결과로 판명 났을 때 귀족 친구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위클리프는 교회의 신조와 의식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비판한 것은 화체설 (성찬식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었다. 보편개념들이 실재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실재론자였던 그는 만일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에서 화체설을 비판했다. 그런 다음 더욱 노골적으로 화체설이 우상숭배이며 비성서적이라고 단죄했다. 그는 화체설을 '빵은 축성을 받은 다음에도 그대로 빵이다'라는 잔류교리로 대체하고, 물체의 형태를 지니지 않는 실재임재의 이론을 덧붙이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를 보호하려는 귀족들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고, 그의 견해는 1381년에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음해인 1382년에 대학으로부터 강제로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이미 1380년에 루터워쉬로 옮겨가 있었다. 거기서 성서번역 계획과 성서의 진리를 민중에게 전할 청빈설교자회 설립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게 활동하다 중풍으로 1384년 12월 미사 중에 쓰러져 죽었다.
존 위클리프의 <사목직에 대하여>로 부터
옳은 삶을 살기로 한 목사의 모든 직무 중에, 가장 칭송할 것은 거룩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첫 번째 진리는 태안에 그를 임신하고 그를 양육한 단 한사람 칭송받을 여인에게 말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복되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을 듣는 것만큼이나 위대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는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큰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듣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행함으로 그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실행이 실행하려고 하는 것보다 상위에 있는 것처럼, 듣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 더 칭찬 받을 만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가장 지혜로운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에게 하늘의 복음을 전하고 하늘로 올라갔을 때 그의 사도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진실로 가장 슬기로운 주인은 이 가르침이 사도나 또는 감독 안에서 더욱 칭찬받을 만하지 않았다면 이것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무 중에 이 같은 활동은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감독의 특별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몸소 유대인들에게 행했던 기적을 행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의 사도들을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이나 성사를 관할하는 사람을 능가합니다. 복음을 널리 펼치는 것이 훨씬 넓게 더 분명하게 이익을 가져옵니다. 사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가장 귀중한 활동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판단을 공표하는 왕들의 재판관들은 특별한 명예 안에서 왕에게 다음에 지명되는 것처럼, 진실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권위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